안녕하세요. 저는 50대 중반 여자입니다. 저는 반 100년이 넘는 시간을 살아오면서 나름대로의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고 생각하며 살았었습니다.
신께서는 사람이 딱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시련만 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게는 왜 이렇게 가혹하게 구시는 건지…. 세상이 아무리 좁다지만 이렇게 좁을 수 있나 싶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보다 더 것들이 많으신 여러분들께 제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하소연 좀 하려고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저는 위로 오빠가 하나 있고 아래로 남동생이 하나 있습니다. 그렇게 3남매 집안의 둘째로, 여자아이로 태어난 저는 오빠와 동생처럼 공부에 뜻을 이룰 수가 없었어요.
저희 집은 굉장히 가부장적인 집안이었어요. 그렇다 보니 당연히 저는 오빠와 동생의 뒷바라지를 해야만 했습니다.
당시에는 저와 같은 사람들이 무척이나 많았기에 그게 억울하단 생각조차 들지 않았었네요. 그래도 다행이었던 것은 오빠와 남동생은 자신들의 여동생이자 누나인 저를 끔찍하게 챙겨주었어요.
그래서 저도 오빠와 남동생의 뒷바라지를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오빠 남동생 둘 다 공부를 무척이나 잘했었기에 학업적으로도 성공한 사람이 될 수 있었어요.
그렇게 다른 날과 다름없이 가족들의 뒷바라지하는 삶만 살아가고 있었어요. 그러다 저희 어머니가 선자리 하나 받아오셨죠.
그때 제가 20대 중반 정도였는데 여자가 나이 먹으면 아무짝에 쓸모가 없다며 두 분 다 성화를 내셨어요. 그 등쌀에 못 이겨서 선자리를 나가게 되었고 자리에서 지금은 헤어진 전 남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편의상 남편이라고 칭하도록 할게요 솔직히 저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그때 만난 남편의 얼굴을 잊지 못할 것 같기도 합니다.
젊었을 적에 남편의 얼굴은 무척이나 잘 살다 생겼었거든요. 엄청나게 말이에요. 그때 선을 보기로 한 약속 장소는 시내에 있는 한 찻집이었는데 찻집 안에서 남편의 얼굴만 반짝거리면서 빛이 났어요.
그리고 그런 생각을 저만 한 것은 아니었던 것인지 찻집 안에 앉아 있던 모든 손님들이 남편의 얼굴만 힐끔힐끔 쳐다보고 그러더라고요.
아무런 기대도 없이 나온 선자리에서 이렇게 잘생긴 남자를 만날 줄 감히 상상도 못 했었어요. 그리고 남자가 제가 만난 첫 남자가 되었죠.
첫눈에 반한다는 느낌이 뭔지 그날 처음 알게 되었어요. 그렇게 푹 빠져서 제가 졸졸 쫓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럴 때마다 자꾸만 남편이 “나 너무 좋아하지 마, 그러다 너 다쳐”라고 했어요.
그때는 그 말이 어찌나 멋있게 들리기 시작하던지, 어머니는 제가 좋아하면서 졸졸 쫓아다니기 시작하자 지금이 아니면 시집을 못 보내겠다 싶으셨던 것인지 한시바삐 저희 두 사람의 결혼을 밀어붙이기 시작하셨고 일사천리로 날짜를 잡게 만드는 성과를 보이셨어요.
그렇게 우리 두 사람은 식을 올렸고 부부의 연을 맺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습니다. 제가 꿈꿔왔던 신혼생활이라든지. 꿀이 뚝뚝 떨어져서 안달 정도로 알콩달콩할 일상생활들은 하나도 없었어요.
저도 이제 뒷바라지 생활 그만하고 남편과 가정을 일깨우며 살겠지 하며 기대했던 제 자신이 우스울 정도로 말이죠. 남편은 한량과도 다름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결혼 이후, 다니고 있던 직장도 때려치우고 저희 집 생활비를 조금씩 훔쳐가서 무도회장을 누비며 살았어요. 천성을 게으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처럼 일을 하는 법이 없었죠.
저는 매일 일개미처럼 일을 하며 생활비를 푼돈으로라도 벌어보겠다고 애쓰는데 남편은 배짱이 마냥 놀 줄만 알더라고요. 그렇다고 저와 사이가 좋냐고 물어보면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루는 제가 남편을 붙잡고 이럴 거면 나랑 대체 왜 결혼을 한 거냐고 울부짖으면서 통곡을 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남편이 제게 자신의 진심을 처음으로 이야기하더라고요.
“너랑 왜 결혼했냐고?
니가 늘 졸졸 쫓아아다녔잖아.
그래서 한 거야.
그리고 그때 내가 만나고 있던
유부녀가 하나 있었거든?
그런데 자꾸 이혼하니 마니 하면서
헤어지진 않고 그래서 질투심 좀 유발하려고
그때 날 쫓아다니던 너랑 결혼한 거였던 거야”
저는 니가 날 이렇게 대하고도 사람이냐고 울며불며 따졌어요. 그러다가도 이제라도 마음잡고 같이 열심히 힘내서 살자며 다시 남편을 살살 달랬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더 이상 이야기도 듣기 싫다는 듯 귀를 후비적거리면서 알겠다며 대답만 계속하더라고요. 그런 모습을 멀거니 쳐다보면서 절 사랑한 적이 있긴 했는지 물어봤습니다.
그리고 질문에 대해서 아무런 대답도 들을 수 없었죠. 앉아서 눈물만 펑펑 쏟아내는 절을 향해 남편은
“그러게, 내가 나 너무 좋아하지 말랬잖아.
너 다친다고 내가 보면 경고했잖아.
그런데도 나 좋다고 쫓아다닌 건 너야.
누굴 원망해?”
하며 낄낄거렸죠. 그 이후로 남편과 저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의무적인 합방을 하는 날을 제외하면 말이에요.
그렇게 하루하루 어거지루 살아가고 있는데, 문득 내가 왜 이러고 살고 있나 하는 회의감이 오더니 무척이나 서글프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내가 배움이 짧고 제대로 가진 것 하나 없어도 이런 취급을 받을 정도의 사람인가 싶기도 해서 무작정 짐을 싸서 친정으로 도망을 왔습니다.
당연히 어머니와 아버지는 놀래 자빠지셨고 제게 호통을 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여자가 시집가서 짐을 싸서 집으로 돌아오는 경우는 대체 무슨 못 배워먹은 경우냐고 하면서 말이에요.
이렇게 더 살기 싫다며 저도 처음으로 그렇게 대들어 봤던 것 같아요. 남편은 아내가 친정에 도망을 가든 말든 상관도 하지 않아 했죠.
그렇게 별거 아닌 별거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못 배워 먹었다고 호통을 지르고 고성을 지르셨던 저희 부모님도 남편의 행태를 보더니 해도 너무한다고 하셨죠.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남편이 하루는 친정에 찾아와 이야기 좀 하자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제게 이혼을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솔직히 당시는 여자에게 이혼을 하게 되면 아주 커다란 흠이 되던 시기였습니다. 주홍 글씨처럼 꼬리표가 남아 여자를 졸졸 쫓아다니게 되는 그런 거였거든요. 솔직한 이유를 말하라고 했고 끝까지 닦달했어요.
“그게 왜… 저번에 나더러
결혼 왜 하냐고 물었던 적 기억나지?
그때 만나고 있던 유부녀가
내가 결혼하고 나니까
내 마음을 제대로 깨닫게 되었다고
나한테 돌아오고 싶대. 그래서 그러라고 했어.
그러니까 당신도 나보다 좋은 남자 만나서
그냥 잘 살아. 이혼은 꼭 해주고”
라고 하더라구요. 참 비참해도 그보다 더 비참할 수 있을까 싶네요. 순순히 이혼해 달라고 위자료 없이 이혼하자고 요구하는 뻔뻔한 쌍판때기를 보고 있자니 속에서 천불이 나는 것 같고, 진짜 화병이 날 것 같았어요.
그래 이혼을 할 땐 하더라도 내가 곱게는 안 보낸다. 그런 일념 하나로 오빠에게 도움 요청을 했습니다. 저희 오빠는 결국 변호사가 되었거든요.
울면서 오빠에게 쪼르르 다 일러바쳤어요. 저희 오빠 여동생이라면 정말 껌뻑 죽고 제가 죽으라면 죽는시늉까지 하는 양반입니다.
본인과 남동생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여동생의 뒷바라지가 있었고, 희생이 있어서 그런 거라고 술만 먹었다. 하면 1장 연설을 하는 그런 사람이에요.
당연히 저희 오빠 노발대발 화가 났고 집안이 엎어졌죠. 그동안 말하지 않고 혼자 꾹꾹 누르고 삭혀오던 것들도 다 일러바쳤습니다.
그 자초지중을 들은 저희 오빠는 입에서 불이 났고 당연히 부모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어요. 저희 아버지랑 어머니 남동생까지 정말 너나 할 것 없이 화가 단단히 났습니다.
어머니는 남편에게 연락해서 화를 내셨고 아버지는 사돈댁에다가 전화로 욕을 하셨죠. 위자료? 내가 정신이 나갔다고 돈을 안 챙기나 싶어서 아주 박박 긁어올 수 있는 것들을 다 긁어왔습니다.
그렇게 저는 남편과 이혼을 했어요. 남편도 저희 가족들이 합심해서 난리를 치고 그러니 시댁에다 도움을 요청했더라고요.
남편은 제게 꽤 큰돈을 위자료로 건네주면서 제발 합의 이혼을 해달라고 울며 불며 빌길래 그렇게 이혼을 해 줬어요. 그리고 저도 새로운 인생을 살겠다고 다짐을 했죠.
그렇게 이혼 후 두 달이 지났습니다. 매달 정해진 주기야 하는 생리가 나오지 않았고 저는 설마하는 마음으로 임신 테스트기를 사서 시험을 했어요.
그리고 제가 받은 결과는 명명백백하게 나타난 두 줄이었습니다. 저는 세상이 절 버렸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아니라면 어쩜 나한테 이렇게 가혹할 수 있냐고 신이 있다면 멱살 한 번 잡겠다 싶었어요.
당연히 집에서는 아이를 지우라고 성화를 내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또 어떻게 그래요. 제 뱃속에 이미 생겨버린 작은 생명을 제가 무슨 자격으로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집안의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고집이란 고집은 다 부려서 아이를 출산했습니다. 예쁘고 사랑스러운 딸이었습니다.
그래도 이목구비는 지 아빠에 쏙 빼닮아서 아주 연예인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예뻣죠. 출산 이후 처음으로 쭈글쭈글한 아이를 제 품에 안았어요.
우는 아이를 보며 저는 아이에게 아빠를 빼앗은 죄로 남은 인생을 딸을 위해 살기로 다짐했습니다. 물론 남편에게 알리진 않았습니다.
이제 뭐 지 사랑 찾겠다고 나선 놈에게 알려서 뭣하겠나 싶기도 했고 굳이 찾고 싶지도 않았어요. 그렇게 세월이 흘렀습니다. 제 딸아이는 무럭무럭 잘 자라났어요.
아버지가 없는 대신 제 오빠와 남동생이 아빠 역할을 서로 자처하며 정말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들도 사주고 그러면서 말이에요.
그리고 제 딸아이도 참 착하고 이쁘고 똑똑했어요. 매년 장학금과 상이란 상은 싹 다 쓸어오니 내가 나이를 이렇게 먹고 자식이 에 기대어 산다 싶어서 미안하다가도 저렇게 예쁜 딸내미가 내 딸이지 싶어서 대견하다가도 감정이 왔다 갔다 하고 있었어요.
딸아이는 머리가 무척이나 좋았던 것인지 대학교도 국내에서 내놓으라는 곳에 붙었습니다. 딸 키우는 보람이 얼마나 컸는지 몰라요.
이제 딸아이 시집만 보내면 할 일을 다 하겠다 싶기도 했고 후련하기도 했고 아쉽기도 했고 그렇게 감정이 널뛰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대학 시절 내내 공부만 할 줄 알고 공부에 별 관심도 없던 우리 딸아이가 어느새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를 다니며 월급을 받고 지내더니, 어디서 만난 것인지 제게 남자친구라며 어느 청년 하나를 소개해 주더라고요.
키도 훤칠하고 얼굴도 그만하면 잘생겼고 저희 딸아이의 직업과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저를 보자마자 붙임성 좋게 말도 먼저 걸고 대답도 싹싹하게 하는 것을 보니 예의도 바른 것 같고, 참 젊은 청년인데 괜찮은 사람이네 했죠.
조심스럽게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다며 수줍게 말을 꺼내는 딸아이를 보며 벌써 우리 딸이 나이가 되었구나 싶어서 속이 후련하다가도 그래도 아쉽고 마냥 속 좋기만은 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한 해가 지나갔고 두 해도 지나갔습니다. 두 사람은 정말 예쁘게 오래오래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아주 예쁘게도 사귀기 시작했어요.
어느새 저도 딸아이의 남자친구를 알게 된 청년이 제게는 아들처럼 느껴져 아들 하며 부를 정도로 친근해졌죠. 어차피 두 사람 다 결혼까지 생각하고 연을 맺어가고 있었으니 연애를 더 하지 말고 그냥 결혼을 바랬죠.
그런 제 마음을 두 사람은 또 어떻게 알게 된 것인지 상견례를 추진했습니다. 딸아이의 남자친구도 저희 집을 들락날락거리는데 저희 딸아이도 얼마나 집 문지방이 닳고 닳도록 드나들었겠어요.
어차피 양갑 부모님끼리 만나 뵌 적은 없지만, 서로 암묵적으로 두 사람의 결혼을 동의하기로 한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양가 부모님을 처음 뵙는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어요.
개인적인 공간처럼 방으로 되어 있는 고급 한정식집으로 말이죠. 그런데 제가 예상보다 20분이나 늦어버리고 말았어요. 갑자기 가던 도중에 차가 푹 꺼져버렸고 시간이 지체되고 만 것이죠.
헐레벌떡 약속 장소에 도착해서 옷매무새를 단정히 가다듬고 심호흡을 하고 예약된 공간의 문에 노크 후 열어젖혔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가 들고 있던 모든 것을 다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어요. 너무 소름이 끼칠 정도로 깜짝 놀랐기 때문이죠. 딸아이가 만나던 남자친구라는 아이의 부모님 좌석 중 아버지 자리에는 제 전남편이 앉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부녀와 불륜을 저지르다 저와 홧김에 저를 만나 결혼을 했고 이후 부부 생활엔 하나도 기여하지 않다가 마지막에 결국 그 유부녀가 사랑을 깨달았다고 같이 함께 지내자고 했던 바로 전 남편 말이에요.
세월이 아무리 많이 흘러도 그놈 얼굴은 잊혀지지도 않았던 것인지 당최 알 수가 없더라고요. 그렇게 테이블엔 정적 많이 흘렀고 딸아이와 남자친구는 어리둥절해서 서로의 부모 쪽으로 다가가 무슨 일이냐고 좌초지종을 캐묻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더 이상 자리에 서 있을 자신이 없었어요. 그래서 황급히 뒤를 돌아 나왔고 집으로 황급히 돌아갔습니다. 뒤에서 저를 부르는 듯한 딸아이와 남자친구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지만 뒤를 돌아보진 않았습니다.
예비 신부가 될 측의 어머니께서 모친께서 많이 힘들어하시면서 자리를 비었으니 상견례가 뭐 제대로 진행이 될 리도 없고 그대로 자리는 파악이 되었나 보더라고요.
저는 집으로 돌아와 걱정스러운 눈을 하고 자초지종을 묻는 제 딸아이에게 모든 진실을 털어놔 주었습니다. 사실 너의 예비 시아버지가 되실 분이 너의 친아빠란 사실을 말이에요.
정말 하나로 부족해서 제 딸아이까지 불행하게 만들려고 하늘이 작정한 건지 우리 모녀에게 대체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이렇게 행복하게 살게 내버려 두지 못하고 자꾸 시련을 주시는지 하늘이 너무 야속했고 딸아이에게 너무 미안했습니다.
우린 그렇게 그날 하루종일 울었어요. 딸을 부둥켜안은 채로 말이에요. 딸아이는 잘 쓰지도 않았던 휴가, 연차를 회사에다 급히 전화를 해서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동안이나 방에서 잘 나오지 않았어요. 그 사이에 딸아이의 남자친구가 참 많이 찾아왔지만 딸은 외면해 버렸어요.
그 남자친구는 유부녀가 제 전남편과 결혼하기 전 다른 남자의 아이인 것 같더라고요. 그 아이의 새아빠가 되어준 게 제 전남편이 된 것 같고요. 생각을 정리해 보니 모든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꼬박 일주일 동안 딸아이의 방 안에서는 흐느끼는 소리만 간간이 새어 나왔습니다. 그리고 딱 일주일이 지나고 딸아이의 방문이 열렸죠.
그새 얼마나 울었던 건지 일주일 사이 딸아이 얼굴이 반쪽이 되었더군요. 그날 딸아이에게 밥을 양껏 해 먹였고 밤에 둘이서 술 한잔을 기울였습니다. 제가 그랬어요.
“딸… 엄만 괜찮아,
엄마도 너무 놀랍고 당황스러워서 그랬어.
그런데 엄마가 세상을 살아보니까,
정말 녹록지가 않아.
그런데 네가 만나고 있는 민수..
내가 보기엔 참 애가 괜찮다 싶어
그러니까 니가 만나고 싶고 좋다면 그냥 만나
물론 시댁과 왕래를 아예 안 하고 살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으로 부딪히면서 만나서 살아도 돼
엄만 그래도 돼.. 엄마는 니가 행복하면
정말 괜찮아 다 괜찮아”
라고요. 저는 딸아이가 이제 자신의 행복에 집중하길 바라는 마음이 너무 컸거든요. 그런데 딸아이는 거절을 했어요.
“아니야. 엄마 이제껏…
원래도 아빠 없이 살았으니까.
당연히 내 존재도 몰랐던 아빠도 반갑지 않아.
그리고 행복? 그건 내가 알아서 정할 거야.
엄마 나도 엄마가 행복해야 내가 행복해.
내가 민수랑 결혼을 왜 해.
인연이 아닌 거지.
민수랑 결혼해서 불행하다 느끼며
힘들어할 엄마 보는 게 더 힘들어.
그러니까 나 괜찮아.
사실 조금 힘들었는데 이젠 거의 다 정리되었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알았지?”
라고 얘길 해주더라고요. 그렇게 또 둘이서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어요.
딸아이가 민수에게 무슨 말을 한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더 이상 집 앞에 찾아오는 행동들은 사라지게 되었더라고요.
아마 헤어지자고 한 것 같고, 딸아이가 일방적으로 피하고 있는 것 같아요. 식탁 위에 올려둔 딸의 휴대폰 속에는 구구절절하게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민수가 보내온 메시지들이 얼핏 보였거든요.
예전으로 돌아온 것처럼 보이는 딸아이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래도 잘 버텨서 다행이다. 싶다가도 보이지 않는 속은 얼마나 썩어 문드러졌겠나 싶어서 걱정이 눈앞을 가려 눈물만 나왔어요.
저와 남편은 대체 무슨 인연이길래 52살이 넘은 나이에도 그런 말도 안 되는 인연으로 마주치는 걸까요? 제 딸아이에게 저는 무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 미래가 이런 식인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엮이지 않았을 겁니다. 사람 일은 한 치 앞도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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