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부잣집에 입양갔다가 사고로 돌아가신 양부모님…” 혼자 남은 나는 가난에 못버텨 친부모를 찾기 위해 한국에 왔는데, 친부모의 충격적인 ‘정체’에 난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미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제임스킴 김영길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사업에서 큰 성공을 거두며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경제적인 자유를 구축했죠.

남들이 보기에는 이룰 것 다 이뤄서 아쉬울 거 하나 없는 사람처럼 보여지겠지만, 지금의 제가 있기까지의 과정은 평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저는 갓난쟁이일 때 미국으로 입양을 오게 되었습니다. 저를 입양하신 미국의 양부모님들은 참 인자하시고 저를 따뜻하게 대해 주셨죠.

미국인인 양부모님은 제가 부모님과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로 혼란에 빠질까 봐 늘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 제임스 너는 한국 사람이란다. 너의 친부모님은 한국에 계시고 사정이 있어서 나에게 입양을 시킨 거다. 그리고 우리는 제임스 너를 우리의 친자식처럼 생각하고 사랑으로 키울 거란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네가 성인이 되기까지 너의 민족적인 뿌리 문제로 혼란을 초래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너의 친아버지는 정말 좋은 분이셨다 나도 그분만큼 너를 사랑하겠노라고 약속하마”

어린 저에게 매년 생일마다 이런 말을 해주셔서 이제는 제 머릿속에 박혀서 외울 정도였습니다. 그 덕분에 저는 양부모님의 뜻대로 민족성과 관련된 혼란을 겪지 않았죠 양부모님은 저에게 과분할 정도로 사랑을 주셨고 덕분에 어렸을 때는 행복했던 기억밖에 없습니다. 그 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말이죠.

제가 9살이 되던 해 저희 가족은 아리조나에 관광을 다녀오다 교통사고를 크게 당했습니다. 뒷좌석에 있던 저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지만 기적이 저의 부모님에게까지는 미치지 못했죠.

미국에는 한국처럼 고아원이나 보육원 시설이 따로 없습니다. 대신 위탁 보호제도라는 것이 있어서 친부모의 양육을 받지 못하는 아동들에게 일정 기간 가정 환경을 제공해 주는 것이죠.

어린아이를 위탁받을 수 있는 조건은 크게 까다롭지 않습니다. 범죄나 아동학대 등의 이력만 없다면 누구나 가능하죠. 저도 양부모님을 사고로 잃고 두 번째 양부모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실 두 번째 양부모는 철저한 계약적인 관계였습니다. 그분은 저를 위탁해주는 대신 정부에서 지원해주는 지원금을 받는 것이 목표였고 저는 먹고 잘 수 있는 공간을 부여받게 되는 공생관계였죠.

이런 관계 속에서 유년기 시절을 보내다 보니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고 어렸을 때부터 청소나 허드렛일 위주로 육체노동을 주로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성인이 되자 자연스럽게 독립을 하게 되었죠. 성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부모님에 대한 애정이 그리웠습니다. 독립을 하면서 어릴 때부터 간직해 온 친부모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이 극에 달했죠.

그래서 저는 한국에 있는 친부모님을 찾기 위해 한국으로 가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이 사진 한 장만 가지고는 친부모를 찾기란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죠 돌아가신 양부모님께서 저에게 주신 사진 한 장이 있었는데요.

제가 갓난아이일 때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진 뒤에는 서울 고시원 이라는 한국말이 적혀 있었죠. 이 사진은 미국 양부모님이 한국에 있는 저희 친구에게 받은 사진이라고 했습니다.

뭔가 다른 방법이 없을까? 고민을 하던 차에 여기저기 알아보니 한국에서 해외로 입양된 무연고 아동이 가족을 찾기 원하면 재해공관을 통해 입양인의 유전자 채취 및 등록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바로 한국으로 가서 유전자 등록을 실시했죠.

“이런 시스템이 있다는 걸 부모님도 알고 계시다면 그리고 나를 만나려는 의지가 있다면 분명 유전자 등록을 했을 거야”

라는 생각을 하며 긍정적으로 결과를 기다렸습니다. 사실 조금 불안한 마음이 컸습니다. 애초에 나를 찾을 생각이 있었다면 미국이라는 먼 타국으로 나를 입양을 보냈을까? 아이의 나라는 존재를 잊어버린 건 아닐까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죠.

하지만 한국까지 와서 이런저런 부정적인 생각을 해봐야 좋을 거 없다는 판단을 내렸고 최대한 긍정적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세웠습니다.

당분간은 한국에서 지내며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경험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했고 또한 한국에서 해결을 하기로 했죠.

한국에서 지내는 것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습니다. 미국에서 어렸을 때부터 워낙 힘든 노동을 하면서 살아왔던 터라 익숙해진 탓이었죠. 그렇게 한국에서 열심히 생활하고 있던 어느 날 문자 한 통이 도착했습니다.

‘ 등록하신 유전자와 일치하는 유전자가 없습니다. ‘혹시나 했던 불안감은 역시나로 돌아와 저의 마음을 후벼 팠습니다. 저의 친부모님은 저를 찾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신 거였죠.

어쩌면 당연한 말일지도 몰랐습니다. 애초에 찾을 거면 외국으로 입양을 보내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왜 친부는 나를 찾지 않으려고 하는가? 나의 존재를 부정하고 싶은 것인가? 저는 이 현실이 너무나 슬펐지만 한편으로는 오기가 생겼습니다.

친부를 내 손으로 직접 찾아서 꼭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왜 나를 입양 보낸 것이냐 왜 나를 찾지 않은 것이냐라고 말이죠.

그런 생각까지 들자 한 부까지 와서 포기하는 게 더 억울한 일이라고 생각해 결국 사진 한 장만을 가지고 친부를 찾아 헤매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친부를 찾아 다닌지 수개월이 흘렀지만 진척은 없었고 수중에 돈은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한국에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겨울이 되었고 저는 머물던 고시원에서 쫓겨나고 말았죠.

고시원은 월세가 밀리면 바로 퇴출이라면서 말이죠. 제가 고시원에 머무르게 된 것은 친구가 남겨준 사진 뒷장에 있던 서울 고시원이라는 문구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서울에 있는 고시원이란 고시원은 모조리 뒤지고 있었고 그중 저렴한 한 곳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이죠. 한국의 겨울은 제가 생각했던 이상으로 추웠고 날카로웠습니다.

노숙을 해야 할 판국이었지만 이런 날씨에 노숙을 하게 되면 얼어 죽는게 더 빠른 날씨였습니다. 결국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못 보던 고시원한 곳을 발견했고 그곳에 들어가 사장님에게 오늘 단 하루만 묵을 수 있도록 허락을 구했습니다.

드릴 돈은 없으나 일을 해서라도 숙박비 값을 치르겠다고 말씀을 드렸죠. 그랬더니, 고시원 사장님은 의외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 자네 나이가 몇인가? 그리 젊고 좋은 나이에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지. 왜 그러고 다니는 건가?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겐가? “

젊은 나이에 고시원의 1박을 구걸하는 제 모습에 궁금증이 생긴 모양이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에서의 일들과 제가 한국에 온 이유 등 저의 이야기를 들려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이게 웬일인지 흰머리가 지긋하시고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한 사장님께서 눈물을 보이시는 겁니다.

” 그런 사연이 있었구만 다 늙어서 주책이지… 그래 친부를 찾는 거면 유전자 등록은 한 건가? 요즘에는 그거라면 바로 찾을 수 있다고 하던데 말이야.

아무튼 친부를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네가 기본적인 사회활동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 직장을 가지고 돈을 벌라는 말일세,

자네가 사회적인 기반을 다질 때까지는 여기서 머물러도 좋네. 다만 자네가 방 청소 정도는 좀 도와줬으면 좋겠네. 그리고 아직 한국말이 서툴지만 한국말도 제대로 공부를 하게나”

저는 이 고시원 사장님이 아니었다면 길에서 객사를 했을지도 몰랐습니다. 저에게는 은인과도 같은 분이셨죠. 덕분에 저는 훨씬 안정적으로 한국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어와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를 할 정도가 되니 사회에서도 기회가 엄청나게 많아졌습니다. 이후로 저는 사업 구상하면서 사업자금을 동시에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정도 돈이 모이자 고시원 사장님에게 인사를 드리고 그동안 밀렸던 방세를 드리려고 했지만, 끝내 받지 않으시고 오히려 가기 전에 식사나 같이 하자고 하시면서 밥을 차려주시더라고요.

이러면 제가 정말 염치가 없다고 말씀을 드리자 웃으시며 다시 한국에 오면 그때 한꺼번에 갚으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정말 힘들 때 아무것도 대가도 바라지 않고 도움을 주신 은인이었기에 반드시 은혜를 갚으리라 다짐했죠.

이때만 해도 그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정말이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저는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 한국과 미국 간의 무역 사업을 주도하는 플랫폼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고 결과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죠. 불과 3년 만에 이룬 성과 치고는 정말이지 과분한 결과였습니다.

운도 많이 따라준 결과였죠. 가난에 시달리며 하루하루 끼니 걱정 잠자리 걱정을 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이렇게 성공한 제 자신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그리고 저는 다시 한국을 찾았습니다. 고시원 사장님도 만나 뵙고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었죠. 그리고 이번에는 반드시 은혜를 갖고 말이라는 다짐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게 웬일인지 고시원의 사장은 바뀌어 있었고, 제가 알던 사장님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한동안 수소문을 하면서 찾아보았지만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죠.

그러던 어느 날 문자 한 통이 왔습니다. 경제활동에 집중하면서 한동안 잊고 살았던 친부의 소식이었습니다. 과거 친부를 찾기 위해 유전자 등록을 해 놓았던 것에 대한 새로운 결과 안내였죠.

‘ 일치하는 유전자가 발견되어 2차 확인이 필요합니다.’

순간 저는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그토록 찾아 헤매일 때는 일치하는 유전자가 없었던 친부의 흔적이 이제야 발견이 되다니요.

고시원 사장님을 찾는 일을 잠시 뒤로 미룬 채 친부의 흔적을 찾아 나섰습니다. 기관의 도움으로 친부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죠.

서울의 어느 허름한 집이었고 그곳으로 들어가니 젊은 여성이 혼자서 마당을 청소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평상에는 누군가의 제사상이 차려져 있었죠.

제사상 차림에 올려져 있는 영정 사진으로 자연스럽게 눈길을 돌린 저는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거기에는 고시원 사장님의 사진이 있었으니까요.

네 맞습니다. 제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은혜를 베풀어 주신 고시원 사장님이 저의 친부셨습니다. 마당을 청소하는 여성은 제 친부의 딸 저한테는 이복 동생이 되는 셈이었죠.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아버지는 제가 미국으로 떠난 뒤 횡단보도를 건너던 아이가 차에 치일 위기에 처하자 아이를 구하려다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동생에게는 늘 저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다고 했죠. 찢어지게 가난한 시절 저더러 최소한 굶어 죽지는 말라고 입양을 보낸 것이라고 말이죠.

그리고 고시원을 운영할 수 있게 되면서 제가 아버지를 찾으러 올 수도 있다는 생각에 유전자 등록도 미리 해놓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기관 직원의 실수로 인해 제가 유전자 등록 신청을 했을 때는 서류가 누락되어 잘못된 결과가 나왔던 것이죠. 아버지는 그때 저의 기구한 사연을 들으시며 미국에 입양을 보낸 저를 생각하신 걸까요? 그래서 저에게 그토록 아낌없는 지원을 해 주었던 것일까요?

아니면 혹시라도 제가 당신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신 건 아니었을까요? 이제는 그런 걸 물어볼 아버지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죠.

그리고 얼마 후 저는 미국에서의 삶을 청산하고 한국에 돌아와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고아 아이들을 위한 자선사 업체를 설립하여 운영중이죠.

아버지와 아들로서 대화를 나누어 보지는 못했지만, 저는 아직도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저에게 해주었던 식사 한 끼를 잊지 못합니다. 아버지도 아마 저와 같은 마음이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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