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지금껏 어떻게 사셨어요…” 돌아가신 엄마의 유품에서 발견된 일기장 속 충격적인 ‘내용’을 읽은 난 한참을 가슴치며 오열하고 말았습니다

50대 주부입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남긴 유품을 정리하던 중에 어머니가 쓰시던 일기장이 있어 적어볼까 합니다.

1960년 7월 11일

정수리 위의 햇빛은 늦은 저녁이 되어도 계속해서 비추는 것 같은 더위가 느껴졌다 만삭의 몸을 이끌고 빨래하는 일은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매번 땀에 젖어 습한 것인지 빨래에 물이 뛴 것인지 몰랐다. 시어머니는 꼭 더운 물에 빨래를 해야 때가 잘 빠진다며 한소리 하신다 더울 때는 더운 물로 하라 하시고 추울 때는 냉수로 해야 때가 빠진다고 하시니 뭐가 맞는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겠다.

내가 남편 잡아먹은 과부라 미움을 받는다는 것, 그래도 뱃속의 아이에게 어미가 미움받는 소리를 듣게 하는 게 싫었다. 그래서 웃었다. 저 말은 어미를 이뻐해서 그런 것이라 웃는 것이니 속상해하지 말라며 아이가 듣게끔 웃으며 알겠다고 답했다.

출가외인이라는 아버지의 말로 어머니를 못 뺀 지가 1년은 넘어선 것 같다. 아마 우리 어머니도 나와 같은 행동을 했을 거라 생각한다. 어머니가 보고 싶은 밤이지만 웃을 것이다. 아이가 듣지 못하도록…

1960년 7월 12일

아마도 내일이나 모레쯤이면 아이가 나올 것 같 자꾸 아이의 눈물이 밑으로 흐르는 것 같았다. 점점 배가 아파오지만 소리를 지를 수 없었다.

시어머니가 짜증을 내신다. 나 때는 넷, 다섯을 낳아도 밭에서 일을 했다며 말씀하신다. 더 엄마가 보고 싶었다. 어릴 때 맡았던 엄마의 젖내음이 그리워 울다가도 웃었다.

곧 나올 아이에게 엄마의 눈물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아파도 힘들어도 웃으며 견디는 나의 엄마 같은 엄마가 되고 싶었다. 조만간 나올 아이를 위해 더 강해져야겠다고 생각하는 밤이다.

1960년 7월 13일

움직이기도 힘들고 점점 물과 피가 새어 나왔다. 시어머니는 산파를 불렀고 다리 밑에 이불을 깔았다. 너무 아팠지만 소리를 지르면 시끄럽다며 다그치시는 시어머니 말씀에 속으로 울었다.

그렇게 아이가 나왔고 딸이라는 말에 어머님은 나가셨다. 너무 이뻤다. 햇빛보다도 달빛보다도 눈이 부셨다. 그렇게 그간 울지 못했던 감정이 아이의 울음소리와 함께 터져 나왔다.

다행히 아이의 울음소리는 어머님이 뭐라고 안 하셔서 많이 울었다. 태어나자마자 휴녀인 우리 아이

1960년 7월 30일

영숙이는 포대기를 참 좋아한다. 어미의 등은 땀 범벅이라 더울 텐데 잠 잘도 잔다. 저기 여름을 알려주는 매미처럼 꼭 붙어있는 게 보이진 않아도 색색 잠든 소리는 언제 들어도 좋은 노랫소리다.

아마도 우리 영숙이는 이금희보다 더 노래를 잘할 것이다. 우리 엄마도 나에게 노래를 잘한다고 했는데, 이런 마음이셨을까?

오늘은 시어머니와 장을 보러 갔다가 많이 혼났다. 걸음이 늦어진다며 그럴 때마다 영숙이가 울었다. 시어머니는 애미나 딸년나를 달고 말씀하신 하지만 잔소리를 막아주는 우리 영숙이 덕분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1960년 9월 1일

오늘은 영숙이 아빠가 떠난지 꼬옥 1년 된 날이다. 어머님이 많이 우셨다. 나도 많이 울었다. 크게 울 수는 없었다. 우리 영숙이가 들으면 속상할 것 같았다.

속으로 끄윽 우는데도 우리 영숙이는 어미를 보곤 같이 울었다. 이 작은게 뭘 안다고 같이 우는지 미안했다. 앞으론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오늘만 울고 울지 말아야지 다짐하는 밤이다.

1960년 11월 23일

내일은 내가 세상에 빛을 본 지 꼭 19년 된 날이다. 어머님에게 말씀드렸다 집에 다녀오겠다고 1년 넘게 못 가본 집이기에 용기 내어 꺼내본 말이다.

어머님이 웬일로 다녀오라고 하셨다. 기분이 너무 좋아 방에서 영숙이를 안고 춤을 추었다. 그런 어미의 마음을 아는지 방긋방긋 웃어주었다.

영숙이도 할머니 할아버지 찾아뵙는 일이 좋은가 보다. 1960년 11월 24일 아침 일찍 일어나 밥상을 차리고 다녀오겠다고 인사드렸다.

뭐 그리 급하냐며 과부가 돌아다니면 보기 안 좋다며 해지기 전에 들어와 저녁을 차리라고 하신다. 부리나케 준비하고 다급히 집을 나섰다.

우리 영숙이가 세상에 나올 때만 해도 땀이 줄줄 났는데 이제는 온몸이 차다. 그래도 우리 엄마가 만들어줄 팥죽을 생각하며 지금의 차가운 공기를 즐기고 있다.

집에 들어서니 같은 일상이었다. 엄마를 보자마자 눈물이 나왔다. 그러면 엄마가 속상해할 텐데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엄마도 울었다.

왠지 모르게 영숙이만 웃었다. 엄마는 기뻐하셨다. 애기가 애기를 낳았다며 좋아하셨고 팥죽도 만들어 주셨다. 오랜만에 아버지의 담배 냄새도 좋았다.

우리 집의 냄새가 좋았다. 특히 엄마의 냄새가 너무 좋아서 계속 눈물이 났다. 엄마의 젖가슴에 안겨 자고 싶었다. 하지만 어머님이 저녁까지 돌아오라는 말에 다시 나왔다. 이런저런 반찬들을 들고 영숙이를 등에지고 집으로 오니 11월의 찬바람은 오히려 시원하기까지 했다.

1961년 1월 1일

새해다. 영숙이가 두 살이 되었다. 나의 두 살은 어땠을까? 영숙이처럼 가만히 누워서 엄마를 바라보고 웃고 있었을까?

해질 역마다 막걸리를 찾던 남편이 그리워졌다 그렇게 막걸리에 담배를 태우던 남편이 있었으면 뭐라고 했을까? 1961년 1월 5일 영숙이가 계속 울었다.

새벽부터 계속 울었다 아버님,어머님 모두 계셔서 시끄럽다고 한소리 하신다. 왜 우는지 어디가 불편한지 몰랐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같이 울었다.

어머님에게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다. 돈을 쥐여주시며 시끄럽다고 병원 가라고 하신다. 울면서 뛰었다. 문은 닫혀 있었다. 계속해서 두들겼다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10분을 울며불며 두들겼다 옆집 약방 아저씨가 무슨 일이냐며 나오셔서 도와달라고 붙잡고 울었다. 열이 오른 것 같으니 약을 먹이자고 하신다.

그렇게 약을 먹고 병원 문이 열릴 때까지 울면서 발을 동동 구르며 약방에서 기다렸다. 사람들이 오길래 병원으로 뛰어 들어갔다.

의사 선생님은 감기 같다고 하시며 약방 선생님과 얘기하셨다. 그렇게 진정이 되었다. 영숙이에게 너무 미안했다.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에게 엄마가 되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하고 싶었다.

그렇게 진정이 된 영숙이를 안아들고 집으로 오는 길에 발이 아파서 보니 맨발이었다. 어머님에게 혼날 생각이 들어서 아무도 못 볼 때 들어가야겠다고 다짐하면서 들어갔다 다행히 들키지 않았다. 밤새도록 문을 여는 병원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달님에게 소원을 빌면서 잤다.

1980년 3월 2일

영숙이가 결혼하는 날이다. 어미 등에 매미처럼 매달려 있던 갓난아이가 시집을 간다. 그 갓난아이가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겠다고 한다. 말리고 싶었다. 조금만 더 엄마 옆에 있어 달라고 하고 싶었다.

너 없이 살 수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 잘 커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영숙이를 떠나보냈다. 내가 엄마에게 자주 가지 못했지만, 너는 그러지 말아달라고 속으로 소리쳤다.

자주 오라고 매일 오라고 한 시간에 한 번씩 전화 달라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의 전부였던 영숙이가 최서방에게도 전부가 되게 해달라고 달님에게 소원을 빌면서 잤다.

1981년 1월 1일

새해를 맞아 집을 대청소했다. 저기 장롱 구석에서 영숙이가 쓰던 포대기를 발견했다. 참.. 아직도 안 버리고 갖고 있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녀석이 쓰던 물건들 학용품 입던 옷들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라도 남겨놓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눈물이 났다. 영숙이를 안고 병원에 뛰어가던 때가 생각난다. 아직도 발바닥에 남아있는 상처들을 보며 괜히 웃음이 났다.

1982년 3월 2일

엄마가 죽었다고 오빠한테 연락이 왔다. 하얗게 분칠하고 말라 있는 엄마를 보았다. 엄마가 살아 생전에 나를 많이 찾았다고 하며 미안하다고 했단다. 사는게 바쁘고 과부라는 죄책감에 찾아보지 못한 게 후회가 됐다.

그립던 엄마의 가슴팍에 묻혀 한참을 울었다. 오빠가 말렸다 이제 보내줘야 한단다. 뒤늦게 영숙이가 최서방이랑 왔다. 엉엉 우는 나를 보고 영숙이가 안아줬다.

엄마가 나를 찾았다는 말이 영숙이를 보는 순간 알게 됐다. 너는 나를 할미처럼 보내지 말아달라고 속으로 외쳤다. 영숙이도 이를 알았는지 자주 전화하고 찾아가겠다고 한다.

1983년 7월 20일

영숙이가 엄마가 됐다고 한다. 딸이라며 연락이 왔다. 병원으로 달려갔다. 나를 보더니 영숙이는 울었고 나도 울었다.

이 못난 어미에게 엄마도 이렇게 아팠냐고 물어본다. “아니 나는 하나도 안 아팠어. 너는 니가 알아서 나와서 하나도 안 아팠다”고 했다.

이렇게 우리는 울다가 웃었다. 고생했다고 꼭 안아줬다. 그렇게 집으로 가는 길에 최서방을 불러 통장을 주었다. 그동안 모은 돈이다.

우리 영숙이 건강 챙기고 우리 손주 옷도 사주고 최서방도 같이 맛있는거 먹으라고 주고 그렇게 병원을 나왔다. 이 더운 날 얼마나 고생을 했을지 영숙이가 태어나던 날이 생각나 괜히 더 눈물이 났다.

우리 딸만큼은… 손녀만큼은… 나처럼 살지 않게 해달라고 다시 한번 달님에게 기도를 했다.

1990년 7월 10일

하루에도 몇 번씩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똥이 나오고 구역질이 나왔다. 힘이 빠지고 살도 빠지고 하루하루 힘들다. 시장 사람들은 나보고 살 빠진게 부럽다고 한다.

하지만 아프다. 영숙이에게 말해야하나 하루에도 몇 번씩 고민하지만 괜한 걱정을 주고 싶지 않았다. 몸이 아프니.. 엄마가 생각났다.

엄마도 이런 날이 있었을 텐데 왜 나에게 전화하지 않았을까? 화가 나면서 눈물이 났다. 그러다 보니 더 영숙이에게 연락할 수 없었다.

1990년 7월 15일

시장에서 가게를 보고 있다가 잠든 것 같은데, 일어나보니 병원이었다. 영문을 몰랐는데 이상한 주사들을 놓고 있다. 의사 선생님이 대장암이라고 한다.

그것도 꽤 심각하다고 한다. 정밀 검사해 보자며 보호자를 부르라고 한다. 영숙이에게 말할 수 없었다. 보호자는 없다고 했다. 그렇게 정밀 검사를 했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엄마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밤이다.

1990년 7월 17일

무슨 검사들을 잔뜩 하더니, 죽을 거라고 한다. 치료를 해보자 뭐를 해보자 말들은 많은데 확신은 없다고 한다. 그럴 돈도 없다고 하고 병원을 나왔다.

약값도 비싸다. 진통제 같은 걸 처방받아서 그래도 예전만큼은 아프지 않다 시장에 앉아 일기를 쓰는데 점점 힘이 든다.

1990년 8월 1일

영숙이에게 오랜만에 전화를 했다만, 바쁜 모양이다. 애 키우랴 남편 뒷바라지하랴 바쁠 것이다. 그래도 옆에서 애를 같이 키워줄 남편이 있어서 다행이다.

엄마로 태어나 딱히 뭐 하나 해준 것도 없어서 괜시리 눈물이 났다. 우리 엄마도 이렇게 생각하셨을까? 영숙이가 보고 싶은 밤이다. 이 어미를 보고 해맑게 웃어주던 영숙이가 생각이 났다.

이것이 엄마의 마지막 일기였습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2~3주 정도 지난 후에 발견했던 일기장을 보고 며칠을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엄마의 일기장에는 온통 영숙이였습니다. 엄마도 엄마가 있던 사람이고 19살에 나를 낳고 힘들게 시댁살이하던 일들을 보며 너무 미안했습니다.

엄마의 잘못도 아닌데 괜히 과부라고 손가락질 당하고 할머니에게 미움받고 시댁살이하던 모습이 그려져 한참을 울었습니다.

나는 엄마한테 아프다 힘들다. 싫다. 좋다. 많은 감정을 표현했는데 엄마는 그런게 없었습니다. 다 괜찮답니다. 안 아프답니다. 걱정 말랍니다. 엄마가 살아계실 때 한 번이라도 더 전화하고 찾아갔어야 하는데 너무 많은 후회가 됩니다.

이 세상에 하나뿐인 소중한 우리 엄마가 너무 보고 싶은 밤입니다. 사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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