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저는 현재 한국에서 딸과 함께 살고 있는 독일인 필립 프라우저라고 합니다. 낯선 한국에서 사는게 마냥 쉽지만은 않지만 그래도 인생 최고의 행복한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가족들이 모여 함께 사는 게 몇십 년 만이기 때문이죠.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 제가 살고 있는 독일은 유럽에서 이민자가 많은 나라들 중 하나였습니다.
저의 와이프도 한국에서 온 이주 노동자 중 한 사람이었고 간호사와 환자로 만난 저희는 서로 첫눈에 반해 결혼하고 아주 예쁜 딸을 낳았습니다.
엄마를 더 닮아 동양인 느낌이 많이 나는 외모였지만 파란 눈과 오똑한 코만큼은 저를 닮았었죠.
와이프가 독일로 온 덕분에 저는 평생의 인연을 만날 수 있었지만 좋은점만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이주 노동자들이 늘어나면서 범죄율도 덩달아 상승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죠. 그 당시 동남아 가정부를 고용했던 저희는 주변인들로부터 조심하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저는 귀담아듣지 않았습니다.
가정부는 2년이 넘게 우리 집에서 일하고 있었는데다가 굉장히 성실한 사람이었거든요. 그 충고를 귀담아 듣지 않았던 걸 후회한 건 그 뒤로부터 두 달 뒤였습니다.
와이프와 함께 장을 보고 돌아온 어느 날,, 집안에서는 싸늘한 공기만이 맴돌고 있었지만 저희는 ‘아이를 데리고 어디 산책에 나갔나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만큼 가정부를 믿고 있었죠. 하지만 2시간이 넘어서도 감감무소식이자 불안해진 저희는 동네를 뒤지고 다니다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이때만 해도 저희는 가정부가 아이와 함께 위험한 상황에 처해있을 거라 생각했죠. 그런데 의심이 자라나기 시작한건 경찰의 한마디 때문이었습니다.
“이번달만 벌써 세 번째네요.
외국인 가정부랑 아이가 사라진게…”
그 말을 듣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정부가 살고 있는 하숙집에 갔습니다. 하숙집 주인은 그 가정부가 짐을 뺀 지 벌써 며칠이 되었다고 말하더군요.
그제야 우리는 아이가 납치를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죠. 전국 곳곳에 현상수배와 저희 아이를 찾는 전단지를 붙었지만 그 뒤로도 계속 감감무소식이었습니다.
생의 목적이 오로지 아이 찾기 뿐이었던 저희가 피폐한 삶을 정리하기 시작한 것은 그 뒤로 4년 후였습니다.
아이가 실종되고 소식이 없던 저희에게 새로운 아이가 찾아왔지만, 딸을 찾을 생각에만 몰두하다보니 와이프는 쓰러지고 아이를 잃을 뻔한 상황에 놓이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습니다.
저희 부부는 첫째 아이만큼이나 다른 아이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둘째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는 데 집중했습니다.
태어난 딸은 저희의 사랑을 받으면 사랑스러운 아이로 자라났죠. 물론 그렇다고 해서 첫째 딸을 잊은 건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저희 아이는 실종 신고란에 있었고, 저희도 계속 소식을 기다렸죠.
그렇게 세월이 흘러 손자 손녀의 재롱에 기뻐하다가도 모두가 잠든 고요한 밤이 되면 저희 부부는 남몰래 첫째 딸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곤 했습니다.
마음의 병이 몸까지 좀먹었던 탓일까요. 저는 어느 순간부터 가슴이 답답한 증상에 힘들었고 병원에 검사를 받으러 갔습니다.
의사는 심장을 둘러싸고 있는 관상동맥이 막혀있다며 협심증이라고 했습니다. 병증의 정도가 심해 스텐트 시술만으로는 어려워 대수술을 해야 하는데 가슴 뼈를 크게 절제하고 심장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하더군요.
와이프는 일흔을 넘은 제가 가슴 뼈를 절개하는 큰 수술을 버틸 수 있을지 걱정된다고 했습니다.
와이프의 걱정을 듣던 의사가 혹시 외국에서 수술할 생각이 있냐고 묻더군요. 자기가 아는 한국 의사가 로봇을 이용해서 관상동맥우회술을 하는데 로봇을 이용하면 최소한만 절개해서 할 수 있다고 말해줬습니다.
저희는 대한민국 한국으로 넘어가 담당의가 추천해준 병원에서 수술 받게 되었습니다.
수술 전날, 이번에 긴장한 마음으로 잠도 못 이루고 있던 적 간호사가 영어로 저에게 긴장을 풀라고 지금까지 선생님이 수술하셨던 분들은 모두 건강하게 퇴원하셨다면서 위로를 해주더군요.
독일인이지만 영어를 잘했던 저는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죠. 간호사가 걸고 있던 병원 사원증에는 영어와 한국어로 적혀 있었는데 이름이 이정윤이었습니다.
그녀는 다음날 수술에 들어가기 전에도 저의 손을 꼭 잡아주면서 모든 것이 괜찮을 거라고 이야기해줬습니다. 수술실에 들어가자 의료진 중 한 명이 저에게 마취 마스크를 가져다 대면서 숨을 크게 쉬라고 하더군요.
숨을 크게 쉬고 저는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맥박을 알리는 기계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를 수술 전 위로해줬던 간호사가 “깨셨네요” 라고 말을 붙였습니다.
저는 와이프는 어딨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인공호흡기를 착용한 상태라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마음을 아는 듯 간호사 쪽에서 먼저 저에게 수술 직후에는 중환자실 면회는 가족분들도 힘드니 나중에 전화 통화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하더군요.
그 뒤 저는 꽤나 애먹는 시간을 가져야 했습니다. 가래를 빼준다고 인공호흡기를 잠깐씩 떼고 가래들 빼낼 때나 심장 압력 검사를 한다고 세워진 자세에서 수평을 할 때 고통이 말도 못하겠더군요.
무통주사를 사용한다고 해도 쓸 수 있는 양이나 시간이 정해져 있고 아예 안 아픈 것은 아니었거든요.
간호사는 제가 힘들어할 때마다 조심스럽게 손을 잡아주곤 했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격려해준다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는 것을 그때 실감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저는 인공호흡기를 제거했고 와이프와도 통화를 할 수 있게 됐죠. 와이프와의 통화를 지켜보면서 빙그레 웃고 있던 간호사선생님은 이때만 해도 친절하고 고마운 분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그 생각이 바뀐 건 일반 병실로 옮기기 바로 전날이었습니다. 오늘도 저의 상태를 체크하러 온 간호사 선생님은 평소와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눈 색깔이 평소와 달리 검정색이 아니었습니다. 파란 눈이었죠. 제가 파란 눈이 셨다고 묻자 간호사 선생님은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제가 렌즈를 다시 착용하는 걸 깜빡했네요”
라고 말했습니다 5분 뒤 다시 검정 눈이 된 간호사 선생님이 돌아왔습니다. 간호사 선생님은 눈이 뻑뻑해서 잠깐 빼고 있었는데 다시 끼는 걸 깜빡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눈이 예쁜데 왜 렌즈를 쓰냐고 물어보니 어린 시절 보통의 한국인들과 다른 파란 눈 때문에 놀림을 많이 당했고 그로 인해 성인이 되고 나서는 항상 검정색 렌즈를 쓰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혹시나 하는 생각과 함께 그녀에게 묻고 싶은게 떠올랐지만 망설이다 끝내 하고 싶은 말을 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날 저는 정말 오랜만에 실종된 첫째 딸의 꿈을 꿨습니다. 첫째 딸은 저희의 곁에서 행복하게 생활했고 성인이 되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데리고 저를 보러 온 딸의 모습은 바로 그 간호사 선생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깜짝 놀라 눈을 떴습니다. 그리곤 저의 시야에 그 간호사가 들어왔습니다. 이제 일반 병실로 이동할 거라고 하더군요.
저는 병실을 옮길 채비를 하는 간호사를 유심히 쳐다 보았습니다 하얀 피부와 갸름한 입과 긴 눈매 웃으면 반달 모양이 되는 눈, 아내의 젊은 시절을 생각나게 하는 얼굴이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전혀 몰랐는데 한번 의식하기 시작하니 너무 닮아 보이더군요. 중환자실 바깥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던 와이프는 오랜만에 만나 반가운 듯 잘 지냈냐고 물었습니다.
평소 같으면 저도 보고 싶었다고 이야기했겠지만 이때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꺼냈죠.
“저 간호사 당신이랑 닮았지 않았어?”
와이프는 저의 첫 마디에 당황하더니 제가 말한 간호사를 쳐다보았습니다. 저를 다른 간호사들과 함께 중환자실 바깥으로 옮긴 이정윤 간호사는 저와 와이프에게 인사를 하고 가보겠다고 했죠.
와이프가 뚫어져라 쳐다보자 “그녀가 왜 그러시죠?” 라고 의아한 듯 물어왔습니다. 와이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그날 저녁 와이프는 우리 딸이 자랐으면 저렇게 됐을 것 같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일반 병실로 오자
중환자실에 간호사인 그분을 볼 일이 없었죠.
처음에는 저희도 어떻게 독일에서 잃어버린 아이가 한국에 있을 수 있나 미친 생각 아닌가 의심스러웠습니다.
하지만 동양인스러운 외모, 파란 눈, 그것도 와이프를 닮기까지 한 여자가 세상에 흔하게 존재할까요?
저는 저희 병실을 담당하고 있는 간호사에게 이정윤 간호사의 성함을 말하며 그분이 몇살인지 알 수 있냐고 물어봤습니다.
제 질문이 이상했는지 “그건 왜 물어보시나요?” 라고 경계하더군요. 저는 망설인 끝에 예전에 잃어버린 아이와 간호사님이 너무 닮아서 그렇다. 40년 동안 그 아이를 찾고 있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제 이야기를 간호사는 저를 미친 사람보는 표정 반, 불쌍한 표정 반으로 “심정은 이해하지만 간호사님들의 개인 신상 정보는 함부로 이야기해줄 수 없어요”라고 했습니다.
저희 부부는 어떻게 하면 그 간호사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고민했습니다. 이미 남의 신상을 캐는 이상한 사람들로 찍혀버렸기 때문에 간호사들에겐 요청한다고 해도 들어줄 것 같지 않았습니다.
와이프와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하면서 시간은 흘러갔고 어느새 퇴원 전날이 되었습니다. 오후 10시, 한 여자가 병실에 문을 열고 저희에게 성큼성큼 다가왔습니다.
바로 이정윤 간호사였죠 그녀는 심각한 표정으로 다른 간호사로부터 자기 나이를 물어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아이를 찾고 있다는 말도요. 그녀는 저에게 벌벌 떠는 목소리로 자기는 40여년 전에 납치를 당했다고 말했습니다.
어린 시절 친부모님과 살 때 자기를 돌봐주는 보모 같은 사람이 있었는데 어느 날 돌변하여 어딘지 알 수 없는 공간에 끌고 갔다고 합니다.
험악한 남자까지 3명이 함께 생활하면서 사는 곳도 몇 번 옮겨 다녔고, 때로는 배를 타 다른 나라로 이동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좋은 부모님을 만나려면 자기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자주 이야기 했었다고 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이를 뺏어가 자녀 없는 부부에게 돈을 받고 팔아넘기는 일을 하는 사람들 같았다고 해요. 그런 그녀를 구해준 건 바로 태권도 사범이었던 지금의 한국인 양아버지였습니다.
한밤중에 이동하던 중 지친 그녀가 울음을 터트리자 짜증을 내며 남자가 손찌검을 시작했고 정신없이 맞고 있던 자신을 양아버지가 구해줬다고 했습니다.
양아버지로부터 혼쭐이 난 범죄자들은 줄행랑을 쳤고 정신을 잃은 어린 그녀를 양아버지가 데려갔다고 하더군요.
너무 어렸기 때문에 집은 커녕 자기 이름도 헷갈리는 그녀는 부모를 찾을 수 없었고 천애 고아인 그녀를 거둬 주신 양아버지 밑에서 자랐다고 합니다.
그리고 8살때 아버지가 한국에 돌아가 쭉 이곳에서 자랐다고 하더군요. 참고로 그녀가 양아버지에게 발견된 장소는 스페인으로 독일과는 아예 다른 곳에 있었죠.
그녀의 자초지종을들은 저희는 친자확인 검사를 했고 결과는 99.9%가 한다고 나왔습니다. 같이 검사 결과를 보던 저희는 부둥켜안고 몇 시간이고 울면서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현재 저는 수술 후 건강을 회복했고 딸인 정윤이 가족과 한국에서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정윤이는 결혼을 하여 아들 한 명을 두고 있었습니다.
원래 딸의 이름은 한나였지만 저희 딸을 키워주신 정윤이의 양아버지에 대한 고마움으로 저희도 이제부터는 정윤이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그동안 30년간 함께 하지 못한만큼 앞으로는 딸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낼 것입니다. 딸과 저의 인생의 앞으로 행복함만 가득하길 오늘도 기도합니다
해당 내용은 외국 커뮤니티에 올라온 외국인 사연을 재구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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