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전 한국을 위해 싸워주신 미국인 할아버지…” 6·25전쟁때 박힌 총알로 평생을 고통받다가 우연히 방문한 한국 병원에서 의사에 ‘행동’에 할아버지는 눈물을 펑펑흘리며 오열하고 말았습니다.

6.25 전쟁 때 부상을 입었던 경험이 있는 미국인 참전용사가 한국에서 충격적인 일을 겪었다 하는데요. 그렇다면 이 미국인이 한국에서 대체 어떤 경험을 한 것인지 자세한 내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미국인의 사연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미국에서 살고 있는 직장인입니다. 지금은 그저 특별할 것도 없는 한 가정의 가장이지만 제 어린 시절은 그렇게 평범하지가 않았습니다.

제가 어렸을 적에 부모님은 이혼을 하셨고 저는 독립을 하기 전까지 할아버지 손에 자랐거든요. 그래서인지 제가 가장 존경 하는 사람은 제 할아버지고 할아버지는 제 영혼과도 같은 분입니다.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참전 용사로 대한민국을 위해 싸운 경험도 있는데, 제가 어렸을 적에 잠이 안 온다고 보채면 할아버지는 항상 자신이 한국에서 치렀던 전투 이야기를 해 주시곤 했죠.

할아버지는 한국의 자유 수호를 위해 싸운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씀하셨고 한국인들과 언어는 안 통했지만, 그들의 용기와 전우에는 미군보다도 뛰어났으며 한국군과 등을 맞대고 싸울 때는 늘 든든한 기분이 들었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자신이 더 늙기 전에 꼭 한국을 방문해서 같이 싸웠던 전우들을 찾으러 가고 싶다고 말씀하시곤 하셨죠. 하지만 할아버지는 저를 양육하시느라 평생을 일만 하셔야 했고 한국에 갈 여유가 좀처럼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희생 덕분에 저는 잘 성장할 수 있었고, 독립도 하게 되었어요. 독립을 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저는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키우고 있더군요.

시간은 정말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 거죠. 저는 그렇게 일을 하랴 아이를 돌보느라 바빠서 점점 할아버지를 못 뵙기 시작했어요.

사실 할아버지는 나이에 비해 엄청나게 건강하셨고 저는 할아버지를 보면 늘 마음이 놓여서 자주 못 찾아뵙기도 한 것 같네요.

할아버지는 매일같이 조깅을 하시며 나이대에 비해 스무 살 이상은 젊어 보일 정도로 정정하시거든요. 그런데 몇 주 전에 할아버지를 찾아뵙을 때는 상태가 많이 안 좋으시더라고요.

할아버지는 연신 옆구리를 부여잡으시며 걷기도 힘들어하셨어요. 저는 놀라서 어디 불편하시냐고 물었고 할아버지는 사실 한국 전쟁 때 옆구리에 총알파편이 박힌 적이 있다고 말씀하시며 그때의 의료기술은 좋지 못해서 의사가 총알을 꺼내지 않는 것을 추천했고 결국 수십 년 동안 몸속의 총알과 함께 지내게 되었다고 하셨어요.

그러고는 다행히도 지금까지는 아주 멀쩡하게 지낼 수 있었지만 얼마 전부터 맞은 부위가 아파지기 시작했다며 고통스러워하셨습니다.

저는 몹시 놀랐어요. 이건 처음 듣는 이야기였기 때문이에요. 아마 할아버지께서는 어렸던 제가 걱정할까 봐 말을 하지 않으셨던 모양인데 저는 할아버지를 그냥 두고만 볼 수 없었고 모든 치료 비용을 지불할 테니 당장 병원에 가자고 말씀드렸어요.

그러자 할아버지께서는 진통제를 드시더니, 마치 어렸을 때처럼 제 머리를 쓰다듬으셨어 그러고는

“네가 그런 말도 하다니 이제는 정말 다 컸구나. 나는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고 너에게 그런 부담을 지게 하고 싶지는 않구나. 너도 이제는 가정이 생겼으니 가정에 집중하렴”

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렇게 실랑이 끝에 대화는 마무리되었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저는 할아버지의 말씀을 곱씹어 봤습니다.

사실 할아버지의 말씀은 틀린 게 없었어요. 미국의 살인적인 의료비용을 고려한다면, 총알 파편을 검사하는데 드는 비용만 수천 만 원이 들어갈 테고 수술비까지 합친다면 집 한 채 가격이 들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죠.

뭐 수술을 받고 상태가 호전되면 모르겠는데 연로하신 할아버지가 수술을 잘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고 무엇보다 의사가 수술을 해 줄지도 확신할 수 없었어요.

그렇게 된다면 수천 만 원의 검사 비용만 날리게 되는 셈이겠죠. 물론 마음 같아서는 제 영웅인 할아버지를 위해 빚쟁이가 되더라도 제 모든 것을 바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가정이 있고 세상에는 제 뜻대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정말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결국 저는 여기는 미국이라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됐죠.

아무리 죽을 만큼 아파도 감당이 안 되는 병원비가 더 두렵기 때문에 진통제로만 버텨야 하는 게 미국의 현실인 것입니다. 그렇게 불편한 마음을 안고 살다가 저는 우연히 한국으로 출장을 가게 되었습니다.

사실 한국이라기보다는 그냥 아시아 출장이라고 말해야 정확 같은데, 저는 한국과 중국 일본 등을 돌면서 영업을 하는 업무를 맡았거든요.

하지만 안 그래도 빡빡한 스케줄이라 제대로 휴식도 취하지 못하는 일정인데 저는 제대로 잠도 못 잔 채 출장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최근에 할아버지 댁에 갔다 온 이후 저는 마음에 짐이 생겨 불면증에 시달리게 되었거든요.

그렇게 몇 주 동안 하루에 두 시간도 못 잔 채 중국으로 떠났고 후엔 일본 마지막으로, 한국으로 가게 되었어요.

그리고 결국 한국에서 엄청난 문제가 생겨버리고 말았죠. 저는 일정을 소화하는 내내 피곤에 찌든 상태였고 그렇게 좀비처럼 일하다가 마지막 미팅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던 중 힘이 빠져 그만 길거리에서 그대로 고꾸라졌기 때문이에요.

저는 넘어지면서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고 그대로 오른쪽 손목이 돌아가 버렸습니다. 저는 엄청난 고통에 비명을 질렀고 길을 지나던 한국인들은 제 비명 소리를 듣고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어요.

솔직히 저는 남들이 저를 이렇게까지 도와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는데 한국인들은 정말 자기 일처럼 저를 도와줘서 살짝 놀라기도 했습니다.

저보고 괜찮냐며 병원에 데려다주겠다는 사람부터 구급차를 불러주냐고 물어보는 사람까지 한국인들은 다들 저를 위해 무척이나 애써줬거든요.

하지만 저는 손목의 고통보다 병원비가 훨씬 걱정되었기 때문에 부탁이니 제발 구급차만은 부르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어니다.

구급차 출동비를 감당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러나 다친 손목의 상태가 심상치 않은지 저는 고통 때문에 도저히 일어날 수 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다친 손목을 부여잡고 계속 신음하고 있자 사람들은 그러지 말고 빨리 병원에 가라며 왜 고통을 참고 있냐고 물어봤어요.

저는 죽는 것보다 병원비가 더 무서웠기에 한국인들은 다들 부자라서 병원에 가라고 하는 건가 싶어서 황당한 기분마저 들었죠.

미국에서는 뼈가 부러져도 진통제 하나로 평생을 버티는 사람이 많거든요. 어쨌든 그렇게 저와 한국인들의 실랑이는 계속 이어졌고 곧 이어 구급차가 도착했어요.

그렇게나 구급차 출동비를 두려워하던 저였지만 막상 구급차를 보니 그냥 타고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참기엔 너무 아픈 고통이었고 더 이상 힘도 안 나던 차였거든요.

저는 그냥 자포자기한 채 구급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그렇게 도착한 병원에서 여러 검사를 진행한 결과 제 손목뼈가 골절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고 그렇게 저는 낯선 땅에서 수술까지 받게 되었어요.

이 수술비는 할아버지를 위해 썼어야 했다는 생각에 저는 입원을 하면서도 눈물을 삼킬 수밖에 없었죠. 어쨌든 저는 그렇게 병원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한 뒤 병원비를 결제하고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어요. 구급차에 실려와서 각종 검사의 수술까지 받았는데 병원비가 턱없이 저렴해 때문이에요. 저는 직원에게 제가 보고 있는 금액이 제 수술에 대한 비용이 맞냐고 물었고 직원은 그렇다고 답하더군요.

저는 믿기지가 않아서 집으로 가는 동안에 이것저것을 검색해 봤고 알고 보니 한국은 수준 높은 의료기술과 저렴한 비용으로 유명한 국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저는 한국의 의료 시스템에 감탄했고 이 정도 비용이라면 할아버지께 은혜를 갚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귀국하자마자 집 대신 할아버지 댁을 먼저 찾았고 할아버지께 제 한국에서의 경험을 말씀드리며 수술을 받자고 말했어요.

아버지는 여전히 살 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뭐 하러 그러냐며 반대하셨지만, 결국 제 간절한 부탁의 마음을 여셨고 그렇게 할아버지는 의도치 않게 30년 만에 그렇게나 가보고 싶어 하시던 한국에 가게 되었습니다.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정말 오랜만에 보는 할아버지의 설레는 표정을 보니 뭔가 가슴이 뭉클해지면서도 연신 옆구리를 부여잡으며 고통스러워하시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프기도 했어요.

그렇게 한국에 도착한 할아버지는 무척이나 들떠보이셨어요. 할아버지는 인천공항을 보시더니, 한국이 엄청난 경제대국이 되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이 정도로 성공했을 줄은 몰랐다며 감탄하시더라고요.

그러고는 한국 전쟁 때 본 한국인들의 용기와 투지를 보고 이들은 뭘 해도 잘하겠구나 싶으면서도 이런 아무것도 남지 않은 상무지에서 뭘 할 수나 있을까라는 걱정도 들었는데 멋지게 성공한 모습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할아버지는 긴 비행으로 피곤 하셨을 텐데도 서울로 가는 버스 안에서도 전혀 졸지 않으시고 한국의 풍경을 계속 바라보셨어요.

한국이 이런 아름다운 나라가 될 줄은 몰랐고 자신이 한국에서 싸웠을 때만 해도 산들은 전부 흙과 돌밖에 없는 볼품없는 모습이었는데. 어떻게 저렇게 생명이 가득한 멋진 산으로 다시 태어난 거냐며 말씀하셨어요.

그러고는 자신이 목숨을 걸고 싸운 이유를 한국이 성공적인 국가로 발돋움함으로써 증명해 주었다며 너무 뿌듯해하시면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농담까지 건네셨죠.

그리고 이 모습을 보지 못하고 전사해버린 수많은 전우들도 하늘에서 한국이 성공한 모습을 보고 자랑스러워할 거라며 눈시울을 붉히셨습니다.

저는 한국의 병원을 미리 알아뒀지만 할아버지는 편찮으신 와중에도 동료들을 만나는 게 우선이라며 서울에 위치한 현충원에 먼저 방문하셨어요.

그렇게 현충원에 있는 모든 전우들과 인사를 나누고서야 할아버지는 비로소 병원으로 향하셨죠. 의사는 할아버지의 상태를 듣더니, 다양한 촬영과 검사를 했고 검사 결과를 보고 학을 떼더라고요.

자신은 꽤나 오랫동안 의사로 일해왔는데 몸속에 총알을 달고 온 사람은 처음 봤다며 말이에요. 그리고 도대체 어쩌다 그런 거냐고 묻더군요.

이 물음의 할아버지는 자신은 한국전쟁에 참전용사고 준공군과의 교전 중에 총알에 맞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한국인 의사의 표정이 순간 진지해지더니, 자신의 할아버지도 6.25 전쟁 참전용사라고 했어요.

그리고 할아버지께 한국을 위해 싸워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더라고요. 또한 옆구리에 박힌 총알이 젊었을 때는 괜찮았을 모지만 나이를 먹고 점점 면역력이 약해지면서 염증이 악화되었고 몸속에 총알이 이동하면서 신경을 건드렸다며 이 경우 수술이 불가피하다 말했죠.

할아버지의 연세를 고려한다면, 원래 수술을 말리는 편인데 할아버지의 건강 상태는 나이에 비해 극히 드물게 양호해서 이대로 수술을 진행에도 좋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할아버지는 수술대에 오르셨고 정말 감사하게도 연로하신 할아버지는 긴 수술을 버텨내셨어요. 할아버지는 빠르게 회복하시기 시작했고, 결국 예정보다 빠르게 퇴원을 할 수 있었어요.

저는 병원비를 지불하기 직원에게로 향했고 저는 직원이 내미는 청구서를 보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수납비가 0원이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죠.

저는 처음에 이건 대수술이기 때문에 미국처럼 병원비를 병원 측과 흥정해야 하는 건가 싶었습니다. 하지만 직원은 당황한 재게 봉투 하나를 내밀더니, 수술을 진행해 준 의사가 이 비용을 전부 부담하고 편지를 남겼다며 돈을 내지 않고 그냥 가도 좋다고 말하더군요.

저는 황당해서 지금 우리를 놀리는 건가 싶었지만 직원의 진지한 모습에 일단 편지를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편지의 내용에는..

“의사 자신의 할아버지도 한국 전쟁 참전 용사로 복부에 총을 맞았지만, 당시의 열악한 의료환경 때문에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했고 후유증 때문에 전쟁이 끝나고 년 뒤 돌아가셨다.”라고 적혀 있었어요.

그리고 “뒤로 자신의 아버지는 그런 모습을 보고 의사가 되고자 했으나, 어려운 형편 때문에 공부는 커녕 죽도록 만해야 했고 결국 아버지가 피 땀 흘려 자리를 잡게 된 뒤 비로소 자신은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다.’고 쓰여 있더군요.

의사는 “자신의 할아버지 동료를 치료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고 한국이 진 빚을 뒤늦게나마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고 하며 한국을 위해 싸워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적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이 편지를 보고 그저 말없이 눈물을 흘리셨고 저는 그런 할아버지를 꼭 안아주었죠. 아마 이번 한국행은 할아버지께 많은 의미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짐 란츠 미국 참전용사.

한국은 할아버지가 평생을 달고 다니셨던 명예의 상처를 치료해 주면서 할아버지께 진 빚을 70년 만에 갚았고 할아버지는 한국이 자신과 먼저 간 전우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훌륭한 선진국으로 성장한 것만 봐도 자신은 이자까지 톡톡히 받은 셈이라며 기뻐하셨어요.

어쨌든 한국은 우리에게 엄청난 감동을 주었고 할아버지의 건강이 회복되면 다시 한번 한국을 방문해서 할아버지 제대로 한국을 즐겨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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