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당시 왜적의 혼을 쏙 빼놨다는 명나라 ‘원숭이 부대’이야기는 지금까지 구체적인 문헌이 없어 설화나 야사 정도로 치부되어 왔습니다.

아래 내용은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이 1751년에 저술 한인미지리서 <택지리 ‘팔도론충청도 편’>의 기록입니다.

“명나라 장군 양호가 원숭이 기병 수백 마리를 소사하 다리 아래 들판에 매복하게 하였다.”

“왜군이 숲처럼 빽빽한 대열을 이루어 북상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거리를 100여 보 남겨놓았을 때 교란용 원숭이들이 말에 채찍을 가해 적진으로 돌진했다.”

“왜적들이 사람인 듯하면서도 사람이 아닌 원숭이를 보고 모두 괴이 여겨 발을 멈추고 쳐다만 보았다”

“혼란에 빠져 조총 하나 화살 하나 쏘지 못하고 크게 무너져 남쪽으로 달아났는데 쓰러진 시체가 들을 덮었다”

현재  충남 천안 일대에서 벌어진 소사전투의 한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소사전투는 편양전투, 행주산성전투와 함께 왜국을 상대로 크게 승리한 육상 삼대첩으로 꼽히고 있는데요.

역사적인 사건을 바탕으로 전투 규모 및 전술 등을 비교적 상세히 적고 있지만 내용 중 실제 했다고 믿기 어려운 ‘원숭이 부대’에 대한 부분은 설화 혹은 야사로 여겨졌습니다. 

<택리지>가 쓰인 시점이 임진왜란 중전되고 150여 년 후였기에 직접 목격한 것이 아니라 구전되는 이야기를 수집해 적는 과정에서 일부 과장된 이야기가 섞여 들어간 것이라고 추측했었죠.

그런데 문헌 속 전설처럼 내려오던  원숭이 부대 이야기가 단순한 지역 전설이 아닌  실제 원숭이들로 구성한 특수부대였을 거리는 흥미로운 문헌이 발견되어 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성균관대 한문학과 안대회 교수는 소사전투를 승리로 이끈 ‘원병’의 이야기가 역사적 근거가 있는 사실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다양한 문헌을 조사하고 분석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을 확인하게 되는데요. 원숭이 부대의 활약상을 사실로 기록한 사료가 <택리지> 하나만 있었던 게 아니었습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연암 박지원은 왕명을 받아 명나라 장수 양호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 <경리 양호 치제문>에서  “농원산백이 한꺼번에 말을 달렸지, 저 교활한 왜적들을 모조리 말굽 아래서 섬멸하였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여기서 ‘농원삼백’이란 ‘적진을 교란하는 300마리 원숭이’라는 뚯인데요. 원숭이들의 공을 치하하는 내용은 <택지리>와 일치했습니다. 

또한, 조선 후기 실학자 이규경의 저서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원숭이와 함께 조를 이루어 싸우는 명나라 군사들의 모습이 좀 더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내용은 “군사들은 붉은 옷이나 비단옷을 입고 있으며 등에는 원숭이  한 마리를 업었다. 왜적이 원숭이를 보고 놀라 혼란스러워하는 통에 완전히 패하였으니 원숭이 또한 전공을 세웠다 한 것이다”라고 서술되어 있었죠.

이런 사료들 중 의병장 조경남이 쓴 <난중잡록>은 임진왜란과 관련된 문헌 중 가장 자세한 기록물로 평가되는데요. 조경남은 소사전투 이후 사명대사가 이끄는 의병이 남원으로 집결했을 때 직접 방문해 원숭이 병사를 목격하고 짧은 소감을 남겼습니다.

문헌에 따르면 “초원(원숭이) 4마리가 있어 말을 타고 다루는 솜씨가 사람과 같다. 몸뚱이는 큰 고양이를 닮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안대회 교수는 원숭이 부대가 실존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말처럼 원병에 대한 언급은 여러 사료와 문헌에 남았었죠.

원숭이 부대는 그림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경북 안동 풍산 김 씨 문종에 대대로 전해오는 <세전서화첩>에서 1599년 2월 명나라 14만 대군이 본국으로 철군하는 장면이 그려진 그림이 등장합니다.

이는 김 씨 문종 조상 19명과 관련된 역사적인 사건을 글과 그림으로 엮어낸 화첩입니다. 총 32점의 그림들 가운데 ‘천조장사전별도’라는 제목의 그림에서 당시 유인원 열 마리가 깃발 아래서 칼을 들고 행군하는 원숭이 기병대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털이 복슬복슬한 유인원은 ‘원병삼백’이라고 적힌 깃발을 들고 있는데, 이는 원숭이 병사 300마리를 의미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동물의 정체에 대해서 진짜 원숭이인지 동물의 분장을 한 사람인지 전문가의 의견이 분분한데요. 일부 교수들은 이들이 진짜 원숭이가 아니라 중국에서 활동하던 아유타야 왕국 출신 병사들일 것이라고 추정했습니다.

여기서 아유타야는 지금의 태국에 있던 나라로 14세기말까지 동남아시아 최대의 세력을 떨쳤습니다. 조흥국 교수는 외국인이 많이 접해보지 많았던 옛사람들이 생김새가 자신들과 다른 동남아시안인을 ‘원병’이라고 지칭했거나 원숭이에 비유했을 가능성을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기는데요. 해당 그림에서 원숭이 기병대 왼쪽 위를 보면 바퀴 달린 수레에 이국적은 회로를 가진 외국인 병사 네 명이 타고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다른 병사들에 비해 몸집이 훨씬 크고 피부색은 까무잡잡하며 머리털은 붉은색으로 표현되어 있죠. 그리고 오른쪽 위에 ‘해귀’라는 글자가 적혀있는데 선조실록 기록에 따르면 “팽신고가 얼굴 모습이 다른 신병을 불러왔다. 일명 해귀라고 한다. 호광의 극남에 있는 파랑국(포르투갈) 사람들로 조총을 잘 쏘고 여러 가지 무예를 지녔다”라고 적혀있었습니다.

이런 자료를 통해 유추해 보자면 당시 외국인이 보기 드문 존재였던 것은 맞지만 생김새가 다른 외국의 사람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원병삼백이 해귀 같은 외국인이었다면 사람이 아닌 온몸에 털이 난 원숭이로 표현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러한 원숭이부대는 명나라의 유명 시인이자 박물학자 사조제가 쓴 <오잡조>에서도 명나라의 유명한 장군 척계광이 야생 원숭이를 조련해 왜적을 물리쳤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척계광 장군이 푸칭 스주산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병사들을 훈련시켰다. 이 산엔 예부터 원숭이 수백 마리가 무리를 이루고 살고 있었는데 병사들이 산에 불을 지르고 총을 소며 훈련하는 것을 여러 날 지켜보더니 본 데로 흉내 내기를 잘하였다”

“이를 본 장군이 원숭이를 잡아들여 좋은 음식과 깨끗한 물을 내주고 말 타는 법과 총 쏘는 법을 가르쳤다.. 어느 날 왜적이 기습을 해왔는데 원숭이들이 적의 진영에 몰려가 일순 쑥대밭을 만들고 적을 교란시켜 쫓아냈다”

“이를 계기로 원숭이들은 군대에 정식으로 편입되었고 왜적을 기습하고 감시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명나라군에 포함된 원벽삼백과 명나라의 명장 척계광이 훈련시킨 수백의 원숭이 군단은 어쩌면 동일한 대상이었던 것은 아닐까요?

카테고리: 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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