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코미디언 이기동을 기억하시나요? 당시 이기동은 그야말로 어린이들의 우상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요.
그 당시 비실이 배삼룡의 춤과 땅딸이 이기동의 춤이 지금의 개다리춤처럼 어린이들이 필수 장착한 댄스가 있었습니다.
당시 인기를 끌던 유명 코미디언 대부분은 유랑극단 출신이 대부분 이였지만, 이기동 씨는 육군 장교 출신으로 근본부터가 달랐다고 합니다.
군 장교들은 마음만 먹으면 좋은 자리 하나는 꿰찰 수 있었지만 그는 연예계를 선택한 것인데요. 이기동 씨는 군 시절부터 남다른 ‘끼’가 있었다고 알려졌습니다.
그는 주로 MBC 코미디 프로그램 ‘웃으면 복이와요’에서 활동을 했는데요. 작고 통통한 체격 때문에 ‘땅딸이”라는 별명으로 활약을 했습니다.
지금은 올드보이 외에 거의 기억하는 사람이 없지만, 70년대 땅땅이 이기동과 비실이 배삼룡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고 둘 다 우스꽝스러운 외모와 말투에서 온 국민에게 웃음을 안겨줬습니다.
이기동은 유행어 제조기로 대표적인 것이 ‘쿵다라 닥닥 삐약삐약’ , “닭다리 잡고 뜯어 뜯어’. ‘안녕이노모하시므레이까’등이 있었습니다.
또한 초기에는 미녀 코미디언 권기옥과 함께 ‘땅딸이 이기동과 늘씬 미녀 미스퀸’으로 안방극장을 주름잡기도 했었는데요. 그는 재치가 있고 대단한 노력파로 전혀 다른 배경을 갖고도 발붙이기 쉽지 않은 연예계에서 성공을 거둔 이면에는 이런 것이 작용했습니다.
이후 이기동과 배삼룡은 당시 인기를 끌었던 사외(요구르트의 일종)를 만들어 파는 운영했지만 두 사람 경영 부실로 인해 그야말로 폭망 했습니다.
어느 날 이기동은 검찰에 의해 사기혐의로 구속됩니다. 유산균 음료를 출하한다고 대리점 계약을 맺었으나 3개월이 지나도 제품이 나오지 않자 대리점 업주들이 손해를 입었다며 고소했던 것입니다.
그의 몰락은 전두환 신군부가 들어서자 두 사람은 ‘저질 코미디언’으로 낙인 씌우고 방송 출연 정지를 달하면서 생계가 끊겨버립니다.
이기동은 한국판 아우슈비츠 수용소라고 불릴 정도로 악명이 높았던 ‘삼청 교육대’에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겪었다고 합니다. 그는 1981년 석방된 후 정신적인 굴욕감과 울분을 참지 못하고 매일 술로 지새웠고 이로 인해 건강은 악화됐고 결국 간질환을 앓게 됩니다.
그 뒤 그의 행적은 방송이나 신문에 언급된 적이 없었는데 1987년 4월 2일 새벽 밤업소 출연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간경화로 사망했다는 신문기사가 발표되었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코미디언 이기동 그의 해학을 오랫동안 볼 수 없다는 것은 애석하고 안타가운 일인데요.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이기동을 검색해도 이제는 그의 대한 자세한 인물정보를 얻을 수 없을 만큼 이미 잊혀진 희극인되었습니다.
웃음이 없던 시대에 작은 봄으로 온국민을 웃겼던 그가 사람들의 기억속에 잊혀져 가는 것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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