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어머니는 60세에 싱글이 되셨습니다. 제 이혼 소식을 듣고 실신한 아버지는 그 후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셨고, 그 지혜로운 어머니는 마치 정신이 반 나간 사람처럼 큰 오빠와 작은오빠 눈치보기 바빴습니다.
이제 아버지 노릇을 하겠다는 큰 오빠 말에 큰집을 팔아 큰 오빠에게 전부 맡겼었고 나몰라라 하는 큰오빠 때문에 작은 오빠의 모든 원망을 제가 다 감수해야 했습니다.
저희 8남매는 어릴 때부터 서로 사이가 좋았지만, 가장 나이가 많은 큰 오빠 때문에 가족과 멀어지면서 형제들의 관계도 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형제들이 모이는 횟수가 줄어들더니 엄마의 표정은 점점 굳어져만 갔고 엄마는 아들이 노름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할말을 못하는 딱한 처지가 되어버렸습니다.
엄마는 원하는대로 형제들에게 돈을 풀어주었고 그런 나에게는 미안했던 엄마는 가끔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널 낳지 않았으면 난 어떡할뻔했니”
“괜찮아 엄마, 엄마는 우리 여덟 잘 키웠고 큰오빠가 지금 자리 잡느라고 힘들어서 그렇지, 효자잖어… 이젠 자식 걱정 그만하고 애인이나 만들어서 즐기고 살아!”
“난 애인은 안돼 네 아빠 같은 남자가 없어”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나에게 슬그머니 말씀하셨습니다.
“남자친구가 생겼어. 작년 해운대 바닷가에 갔다가 만났는데 괜찮은 거 같아서 가끔 같이 등산간단다.”
“어쩐지… 자꾸 등산을 간다더라.. 뭐 하는 분인데?”
“개인병원 의사인데 사별했데”
“이번 엄마 환갑 때 초대해 봐. 내가 언니 오빠들한테 말해놓을게”
저는 엄마 생신 때 호텔 연회장을 하나 빌렸고 엄마 지인들과 여고 동창들을 전부 초대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저씨까지도 초대했습니다.
엄마 남자 친구는 멋진 사람이더군요. 금방 친해질 수 있었고 돌아가신 아버지와 비슷한 분위기가 풍겨 더 좋았습니다.
“그 집 아들이 재혼을 원한다는데 어쩌지?
혼자 계시는 아버지가 좀 그렇다네..”
저희 자식들 대부분은 찬성했습니다.
그런데 작은 오빠만 길길이 뛰며 반대하기 시작했죠.
“안돼 엄마 그런 게 어딨어, 우리 불쌍한 아버진 어쩌라고! 이 나이에도 남자가 필요해? 우리 자식 보며 살면 안 돼? 창피해! 형은 장남이 돼 가지고 엄마 모시기 싫어서 그래? 내가 모실테니 걱정 마, 그러면 아버지 제사땐 어쩔 건데, 엄마! 난 아직 엄마가 필요하다고!!!”
작은오빠의 말도 안되는 궤변을 늘어놓는 미친놈이 보기 싫어 형제들은 일찍 자리를 피했고 소리 지르며 욕을 퍼붓는 나를 엄마가 막으셨습니다.
“그만해라, 없었던 일로 하마.”
그리고 그다음 해, 어느 날 술이 잔뜩 취해 올케와 싸었다고 작은 오빠에게 전화가 왔고 가지 말라고 말리는 나를 뒤로 하고 간 엄마는 다음날 병원 응급실에서 만났습니다.
새벽에 얼까 봐 수돗물을 틀어 놓으려 나오셨다가 쓰러져 뒤늦게 발견된 엄마, 우리 자식들은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혼수상태의 엄마를 처음엔 매일 붙어있었지만 시간이 흐르자, 엄마가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것에 점점 두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오빠와 언니들은 슬슬 볼일들을 보기 시작했고 면회시간을 꼭 지켜 기다리고 있는 건 병원 원장님 뿐이었습니다.
우린 깨어나지 않는 엄마를 기다릴 뿐이었는데 원장님은 엄마를 주무르며 계속 속삭였습니다
“박여사 일어나요. 우리 전에 시장 가서 먹었던 선지국밥.. 그거 또 먹으러 갑시다. 내가 사준 원피스도 빨리 입어 봐야지! “
그리고 원장님은 병원에서 우리 형제들을 불러놓고 말했습니다
“이제 병원에서 해줄 것은 없습니다. 퇴원하셔야 됩니다”
평생 ‘식물인간’이라는 판정과 함께 병원에서는 어디로 모셔갈 건지를 정해줘야 차로 모셔다 준다 하셨는데, 형제들의 반응에 저는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큰 올케가 먼저 말했습니다. 자신은 환자를 집에 모시는 건 못한다고 둘째 오빠는 맞벌이라 안된다 하고 장가도 안 간 28살 막내동생은 그저 울기만 했습니다.
나머지 언니들 표정은 당연히 큰오빠가 해야 된다는 표정으로 본인들 하곤 상관없다는 듯 발뺌했습니다.
오빠들은 되려 저에게 “그동안 네가 모셨으니 계속하면 안 될까?” 하는 표정으로 저를 쳐다봤습니다.
그냥 누워계시는 게 아니라, 산소 호흡기를 꽂고 있어야 하니 모두들 선뜻 대답을 못했습니다. 저는 결국 내 집인 줄 알지만 형제들 꼴을 쳐다보고 있는데,
“저~ 제가 감히 한마디 해도 되나요?”
언제 오셨는지 우리 곁으로 오신 원장님,
“제가 그때 박여사와 재혼을 말했을 때 박여사가 이렇게 말했어요. ‘아직 우리 애들한텐 엄마가 필요한가 봐요 자식들이 내가 필요 없다 하면 그때 갈게요’라고 했어요. 지금도 엄마가 필요하세요? 난 저렇게 누워있는 사람이라도 숨만 쉬고 있는 박여사가 필요합니다 나한테 맡겨주세요. 내 병원이 박여사한텐 더 편할 겁니다.”
그 말을 듣던 둘째 오빠가 통곡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형제들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지만 결국 엄마는 퇴원을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모두 저 마다 믿는 신에게 기도했겠지만 난 엄마에게 부탁했습니다
“엄마! 엄마의 이뻤던 모습만 보고 먼저 간 아버지는 잊고 엄마의 추한 병든 모습까지도 사랑한 이 원장님만 기억하고 가, 엄마! 엄마는 팔 남매 키운 공은 못 보고 가셨지만 여자로 사랑만큼은 멋있었어”
69세 우리 엄마는 그 가슴 졸이며 평생 키운 팔 남매가 아닌 몇 년 만난 남자의 손을 잡고 마지막 숨을 거두셨습니다.
자식이 식물인간이 돼있다면 부모는 무엇을 이유로 댈까요..?
우리 팔 남매는 엄마를 모셔가지 못할 이유가 다 있었습니다. 더 끔찍한 것은 ‘나도 그 입장이라면 그런 핑계를 대지 않았을까?’ 하는 이해가 된다는 것이 너무 절망스럽습니다.
저는 엄마에게 묻고 싶습니다.
“엄마~ 또다시 새 인생을 준다면 우리 팔 남매 낳을 거야?”
이 내용은 실화바탕으로 다뤄진 사연입니다. 어떻게 읽으셨나요? 안타깝게도 이 글은 우리 모두가 처한 환경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자식들은 부모가 필요할 때만 부모님을 찾지요. 그러나 부모님이 자식들에게 짐이 된다면 결국 자식들은 부모님을 외면한다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에 먹먹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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