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18살 때 새엄마가 내 가방에서 담배를 발견하고 어릴 적 친엄마를 생각하며 써놓은 편지를 몰래 읽었다는 사실을 알았던 그날, 여긴 감시 받는 교도소지 집이 아니라는 생각에 집을 뛰쳐나왔습니다.
저는 누나 집으로 도망갔는데, 저희 누나는 새엄마의 구박을 더이상은 못 견기겠다며 진즉 혼자 독립해서 원룸을 구해 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다음날, 누나 집으로 찾아와 저에게 “차라리 그냥 누나 집에서 지내라… 가뜩이나 여자애 혼자 있는 집이라 걱정도 되고 하니까 그냥 너도 여기서 지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20살이 되면서 나와 같이 살던 누나는 외국인 남편을 만나 결혼했고 부모님의 곁을 떠나 외국으로 떠났습니다.
혼자가 된 저는 살 곳을 알아봐야 했습니다. 집에서 지원해줄리는 없고 그렇다고 스무 살에 돈이 있는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해야할지 한참을 고민하던 찰나, 집 바로 맞은편에 골목을 비추는 가로등에 붙여진 고시원임대 광고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월 10만원에 식사와 김치까지 제공된다는 조건이 괜찮아서 종이에 붙어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고시원 원장은 반갑게 전화를 받으며 안 그래도 딱 좋은 방이 하나 남아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당장 잠잘 곳이 없어 찬밥 가릴 신세겠냐 하며 단걸음에 고시원으로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고시원 시설은 좋지 않았습니다.
건물 자체도 굉장히 우중충 한데다 내부는 말을 할 수 없을 만큼 온갖 냄새가 나면서 벽지에 곰팡이와 낡은 흔적이 고스란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참 특이했던건 그래도 방은 정말 깨끗했습니다. 창문은 없지만 냄새도 안 나고 상당히 깨끗했기에 이 돈으로 어딜 가서 구하겠냐는 생각에 저는 어쩔 수 없이 게약을 바로 해버렸습니다.
그런데 문득 고시원 원장이 저에게 “아.. 저기 그런데 바로 옆방에 할머니 한 분이 사셔요. 좀 시끄러울 수도 있는데 학생이 이해해줘요”라고 말했습니다.
저야 공부하자고 들어온 것도 아니었기에 딱히 신경 쓰이지 않았습니다. 그날 짐을 모두 옮기고 낯선 방에서의 밤이 시작됐습니다.
그런데 원장 말대로 진짜 옆방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통화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혼자 떠드는 것 같기도 하고 알 순 없었지만 크게 신경 쓰이는 정도는 아니어서 내 짐을 정리하는데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문을 열었는데 문 앞에는 할머니 한 분이 서 계셨습니다.
“아이고~ 오늘 들어오셨어요?”
“아..네 안녕하세요”
할머니는 인상이 참 선해 보였습니다. 한겨울인데도 고작 내복에 털조끼 하나만 걸치고 있었고 손에는 무얼 그리 바리바리 들고 계신 건지 한참을 내게 고시원 얘기를 해주시다가 대뜸 손에 들고 계신 그것들을 내게 건네주셨습니다.
“학생~ 밥도 못 먹었을 텐데 이거 먹어요. 젊을 때 많이 먹어둬야 해요~
나 같은 늙은이는 뭐.. 이제 죽을 거라 안 먹어도 괜찮아”
하시며 귤 한 봉지와 고추장찌개, 그리고 파전을 주셨습니다. 애써 괜찮다며 할머님 드시라고 말씀드렸지만 사양하지 말고 받아달라는 말씀에 저는 잘 먹겠다고 인사를 드리고 받았습니다.
그리고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할머니는 꾸준히 내 방문을 톡톡 두드리시면서 춥지 않냐며 붕어빵과 여러 과일들을 나눠주곤 하셨습니다.
어느 날 하루는 알바를 하고 방에 돌아와 잠깐 누웠는데 그날따라 “할머니께서 오늘은 조용하시네?”라고 생각만 하고 있던 찰나, 문득 소리가 들렸습니다.
불도 안 켜고 있다 보니 자연스레 옆방 할머니의 목소리가 조그맣게 들려왔는데 처음엔 조금씩 흘쩍이시더니 이내 눈물을 쏟으며 누군가에게 하소연을 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대충 “엄마, 데리러 와주지 않겠냐”라는 말이 오가는 걸 보면 할머니께서 자제분이 있다는 걸 짐작을 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참견할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고령의 어머니를 어떻게 이런 고시원에 혼자 모셔 놓을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뉴스에서 흔히 보던 현대판 고려장이 따라 없구나 하며 씁쓸한 마음에 담배를 하나 물고 밖으로 나가자 그곳엔 고시텔 원장님도 앉아 계셨습니다.
우린 서로 인사를 하며 의자에 털썩 앉아 담배에 불을 붙이는데 문득 원장이 얼굴을 있는 대로 찡그리며 제게 물었습니다
‘그.. 옆방 할머니 좀 많이 시끄럽지?”
“아.. 신경 쓰일 정도로 시끄럽지 않아요. 그냥 통화하시는 거 같던데..”
그러자 원장님은 고시텔 입구를 한번 스윽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춘 채 할머니의 속사정을 말해주셨습니다
“사실 할머니가 아들이 하나 있는데 며느리가
집에서 늙은이 냄새난다고 싫다고 요양원 보내자 그랬대
근데 요양원이 한두 푼 들어?
아들이 글쎄.. 조용한 데 가서 살라고 여기다 보내놨대”
“아.. 저런… 아들분은 찾아오긴 해요?”
“저 할머니가 여기서 4년 살았거든? 근데 딱 한 번 봤어.
뭐 사들고 오지도 않고 그냥 돈 몇 만원 주고 바로 가더라니까
내가 참견할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너무 하잖아 안 그래?”
“아… 그럼 밤마다 그 아들분이랑 통화하시나 봐요?”
저는 할머니가 아들분과 무슨 대화를 하길래 그렇게 서럽게 우시는지 궁금해서 조심스럽게 물어보았습니다.
“참.. 불쌍한 사람이야, 할머니는 집에 한번 가보고 싶다고
데리러 와주지 않겠냐고 엄마가 그렇게 밉냐 그리고 있지..
아들은 며느리한테 잡혀 사는지 절대로 안된다고 그러더래”
“아무리 그래도… 자기 엄마인데…”
그러다가 이내 다른 사람들이 우르르 나와서 우린 대화를 마쳤습니다. 할머니께 그런 사연이 있었다는 걸 알고 나서 할머니는 어쩌면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고 먹을 걸 나눠주면서 조금이나마 그 마음을 달래고자 하셨던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원장님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들어서 인지 옆방에서 할머니 우는 소리가 들릴 때면 ‘또 아들이랑 통화하셨구나’하는 예감이 들곤 했습니다.
그렇다고 방에 찾아가는 건 좀 아닌 거 같고 대화 상대라도 되어드릴까 했었지만 왠지 주제넘는 행동 같아서 그러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저도 결국 사람인지라 할머니의 그런 마음도 알고 고생하시는 것도 충분히 알지만 내가 먹고사는 게 우선이 되어 나를 그렇게 챙겨주시는 할머니께 무엇 하나 도와드린 게 없었습니다.
저는 하루 종일 꼬박 일해서 얼추 200만 원이라는 돈을 모았고 ‘이제 원룸으로라도 갈 수 있구나’.’드디어 그 시원을 탈출하는구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해, 고시원에 들어온 지 2년이 지나 옆 방 할머니가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계단을 힘겹게 내려오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얼른 달려가 할머니의 짐을 들어서 1층에 옮겨 드렸습니다. 저는 뭔가 느낌이 이상해서 할머니께 물었습니다.
“할머니 무슨 짐이 이렇게나 많아요?”
“아이고.. 안 도와줘도 되는데.. 고마워요”
“근데 어디 가세요?”
“아.. 그냥 이제 고시원 나가려고요
나 학생 줄려고 챙겨둔 거 있는데…”
할머니는 작은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은 채 한참을 뒤적거리시더니 이내 꺼내 보인 건 네잎클로버가 들어있는 열쇠고리였습니다.
“좋은 거 못해줘서 어떡하나… 네잎크로바에요.
내가 직접 만든 건데 나 항상 도와줬잖아요.
학생한테 고마워서 주는 거예요.
작별인사도 할 겸…. 이거 가져가요! “
뭔가 모를 서운한 마음이 일었습니다. 고시원 복도나 바깥에서 나를 마주치면 언제나 존대를 해주시면서 항상 뭘 하나 더 못 챙겨주셔서 안달이신 분이 고시원을 떠난다니… 괜히 섭섭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내가 마지막으로 할머니께 해드릴 수 있는 건 그저 제가 끼고 있던 장갑과 목도리를 드리는 게 전부였습니다. 저는 처음으로 할머니께 무언가 해드렸습니다
“할머니~날씨가 아직 많이 추워요…
이건 저한테 항상 먹을 거 나눠주셨으니까
보답으로 드릴게요.
버리지 말고 꼭 하고 다니세요!”
절대 사양하실 줄만 알았던 할머니께서 이제 마지막이라 그런 건지 내 앞에서 장갑과 목도리를 휙 두르시곤, 세상 밝은 얼굴을 하셨습니다
“학생.. 고마워요..”
라며 한 마디하고 짐을 바리바리 챙겨 길을 나섰습니다. 할머니의 뒷모습은 어쩜 그리도 처량한지… 괜한 마음에 눈물이 날 것 같아 고시원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고시원 원장님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저 오다가 옆방 할머니 마주쳤는데..
이제 아드님 댁으로 가시나 봐요?”
그러자 원장은 갑자기 표정이 어두워지면서 담배를 하나 꺼내물더니 제게 말했습니다.
“아휴… 내 아들이었어 봐 아주 그냥.. 어휴…”
“왜요? 또 왔었어요?”
“아니.. 오늘이 방세 내는 날이잖어..
근데 할머니만 방세를 안 보냈더라고..
할머니 방 세는 매달 아들이 보내왔었지…
근데 지금 세 달째 돈을 안 보낸 거야..
할머니도 그걸 아니까 오늘 아들한테 전화했더니
며느리가 대신 받아서 뭐..지들도 힘들다나 뭐라나..
아니 그럴 거면 그냥 있게라도 해주든가?원..참”
원장님은 주변을 힐끗 보더니 이내 말을 이어갔습니다
“내가 올 겨울까지만이라도 돈 안 받고 계시게 해 드릴 테니까
그냥 두시라고 그랬더니 뭐…? 됐대요 또.. 그냥 내보래래”
“아들이 그런 말을 해요?”
“아니~?! 며느리가!!”
원장님은 손해를 보면서도 할머니를 조그이나마 챙겨드리고 싶었지만 결국 못된 아들 내외 덕에 그 조차 날아가버렸습니다.
그 일이 있고 딱 3개월 후 그 할머니 아들이라는 사람이 찾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자기 엄마 여기 있냐면서… 연락이 안 된다며 아직 여기 계시냐고…
그 사람은 고시원 앞에서 계속 전화기만 붙든 채 자기가 지금까지 무슨 짓을 한 건지 모르겠다고 제발 엄마 좀 찾아주면 안 되겠냐며 어린아이처럼 울어대기 바빴습니다.
원장님은 그런 그 남자에게 향해 말했습니다.
“남의 집 귀한 자식이라 내가 함부로는 말 안 할게..
이봐.. 그러지 말았어야죠.. 다 늙은 노인네가
여기서 살아봐야 얼마나 산다고..
올 겨울이라도 내가 여기서 지내게 해 드리겠다니까
본인들이 내보내라고 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찾아달라는 거예요? 가!! 가시라고!!
본인들이 일을 이렇게 만든 거고
어머니 연락 안 돼서 미치겠는 그 감정도
당신들 몫이니까 엄한데 와서 찾지 말고 가쇼”
그 남자는 한참을 그렇게 엎드려 울다가 가버렸습니다.
이후로 나도 고시원을 나왔고 저는 새로운 집에서 새 직장을 얻어 지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우연히 고시원 근처를 지나갔고 이제는 그 고시원도 문을 닫았습니다.
과연 아들은 할머니를 찾았을까. 요즘 날씨가 추워 문득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 써봅니다.
Desk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