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저는 현재 의료계에서 재직 중인 40대 후반입니다. 제가 의료계에서 재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몸이나 마음이 아픈 분들을 많이 만나고는 하는데요.
사실 저도 몸과 마음이 모두 아픈 사람이었어요. 제 인생에 가장 어두웠던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이랑 참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껴요. 그리고 그때의 저를 만든 것도 지금의 제 모습이 된 것도 모두 한 사람 때문이었어요.
오늘은 오랫동안 제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오래된 이야기를 털어보려고 합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저희 어머니는 돌아가셨어요. 유방암으로 2년 정도 투병을 했던 어머니는 항암치료와 수술을 거듭했지만, 결국 손을 더이상 쓸 수 없을 정도로 전이가 되었어요. 더는 가망이 없어 치료를 모두 놓고 마지막 두 달 정도는 집에서 가족과 함께 보냈죠.
그리고 어머니가 숨을 거두고 저는 아버지를 따라 처음으로 장례를 치르게 되었어요. 모두가 울며 슬퍼하고 애도하는 상황 속에서 저는 태어나 처음 보는 사람들의 위로를 잔뜩 받았어요.
그때 저는 어머니를 다시 볼 수 없다는 이야기에 계속 울고 있었고, 죽음이라는 게 무엇인지 잘 몰랐지만 호된 경험으로 느끼고 있었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것 아무리 애타게 불러도 어머니가 나를 안아주러 오지 못하는 것 그게 바로 죽음이구나 하는 것을요..
아버지는 상주로서 장례를 준비하고 사람들을 챙기고 저를 돌봐야 했어요. 너무나 어린 딸은 아무것도 도와줄 수도 힘이 되어 주지도 못하고 계속 울고만 있었거든요.
자신의 슬픔과 아픔도 돌봐야 했을 때 미처 스스로를 돌볼 새도 없이 어린 딸을 먼저 챙겨야 했죠. 생각해보면 제 운명도 가혹했지만, 아버지에게도 무척이나 어두운 시기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그래도 아버지는 정말 강한 분이었어요.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어린 딸과 둘이 남겨졌지만 엄청 긍정적이고 밝은 분이었거든요. 때로 사랑이 모든 것을 이겨낸다고 하잖아요. 아마 아버지는 저를 너무 많이 사랑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기구한 운명도 이겨낼 수 있던 건 아닐까 싶어요.
아픈 어머니를 돌보느라 직장도 그만두었던 아버지는 지방에 배타는 일을 제안받아서 저를 데리고 이사를 했어요.
새벽 일찍 출근하시고 나갔다가 낮에 돌아오니 저를 더 잘 돌볼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일하는 시간 대비 보수도 좋아서 홀로 애 키우기 이만한 직업이 없다고 늘 말씀하시고는 했거든요.
어머니를 잃고 우울하고 슬프기만 했던 저도 이사는 새로운 시작점이 되었어요. 새로운 장소와 낯선 환경에 적응하느라 슬픔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었죠.
그리고 늘 어머니의 흔적으로 가득했던 집을 벗어나니 그래도 점점 괴로움이 옅어지더라고요. 그리움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어딜 가든 어머니와의 추억이 떠오르는 것보다 차라리 새로운 환경이 저희 부녀에게는 도움이 되었던 것 같아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매일 울기만 했던 제가 이사를 한 후 언젠가부터는 다시 웃는 법을 배웠거든요. 그리고 아버지의 도움이 컸어요. 아버지 이름은 제 마음속에 각인처럼 새겨져 있어요.
어머니가 더 일찍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애를 쓰며 키워주셔서 그런지 오히려 부녀 사이가 더 끈끈해요. 아버지에 대한 마음이 더 쓰인다고 해야 할까요? 다정하고 따뜻하고 밝고 언제나 나를 많이 사랑해 주신 분, 제가 지금까지도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이에요.
아버지와 저의 또 다른 추억은 오토바이였어요. 예쁘고 멋진 디자인도 아니고 촌스러운 붉은색의 오래된 오토바이 하나로 저희 부녀는 동네 곳곳을 다니고는 했어요.
시간이 날 때마다 오토바이에 저를을 태우고 바닷가를 한 바퀴 돌기도 하고, 엄마 납골당에 다녀오기도 했어요.
저에게는 아버지와 함께 했던 가장 따뜻했던 기억이에요. 좋은 아버지가 잘 이끌어주어서 저는 학교생활도 성실하게 했어요.
좋은 점수가 나올 때마다 자랑스러워하는 아버지 얼굴이 좋아서 더 열심히 하기도 했어요. 덕분에 초등학교 때도 받아쓰기 100점을 놓친 적이 없고 시험도 항상 좋은 점수를 받아왔어요.
그리고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죠. 제가 살던 곳은 조금 작은 동네라 우리 집 바로 근처에는 중학교가 없어서 버스를 타고 20분 정도 가야 하는 곳으로 입학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열심히 공부했죠.
어느새 1년이 지나고 2학년이 되었어요. 신학기를 맞아 담임 선생님은 아이들 한 명씩 돌아가면서 개별 상담을 했고 개학 첫 주에 제 차례가 되었어요.
담임 선생님과의 첫 면담은 꽤 긴장됐어요. 어떤 분이실지 무엇을 물어보실까? 하는 궁금증들도 있었죠.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는데 선생님이 제 서류를 들여다보면서 갑자기 어머니에 관해 물어보더라구요.
“혹시 어머니 고향이 진해 아니니?”
“어?! 맞아요.”
“여기 보니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적었던데.. 혹시 네가 한 7살쯤 돌아가시지 않았니?”
“맞아요. 제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에요. 어떻게 아셨어요?”
“아유~! 어쩐지 너희 부모님 성함이 너무 낯이 익다 싶었어! 하 세상에 이런 인연이 다 있네~? 나도 지네 출신이거든~ 심지어 너희 어머니랑 동네에서 어릴 때부터 친했던 사이야 ~ 내가 그때 장례식장도 갔었는데 니가 너무 어리고 정신없어서 기억을 못하나 보다~
너희 엄마랑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인가? 이웃집 살면서 서로 언니 동생 하던 사이였어. 그 당시 너희 어머니가 옆집에 살면서 엄청 많이 챙겨줬거든~
너희 어머니 결혼식에도 갔었어. 결혼 후에도 형부랑 그러니까 너희 아버지랑 셋이 밥도 종종 먹었고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가! 너무 신기하다! 영원이 딸을 내가 일하는 학교에서 다시 만날 줄이야! 아버지한테 선생님 이름이랑 같은 고향 사람이었다고 이야기하면 아마 기억하실 거야.~”
너무 신기했어요. 저한테는 낯선 동네라고 생각한 곳에서 저희 어머니를 기억하는 사람을 만나 만나다니 말이죠. 그것도 제가 태어나기도 전 어머니와 언니 동생을 할 정도로 친한 사람을 이렇게 우연히 만나다니 신기하다는 말 외에는 나오지 않더라고요. 저는 놀라움과 신기한 인연의 얼떨떨한 채 면담을 마쳤고 놀라운 일을 집에 가서 얼른 말해드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학교가 끝나자마자 집까지 마구 달려갔죠.
” 아버지!! “
” 아이고~ 우리 딸~! 또 무슨 일인데 이렇게 막 뛰어와! 그러다 다쳐~! “
” 아버지 우리 담임 선생님 말이에요. 글쎄 진해 사람이래요! “
” 뭐?! 진짜? 진해? “
” 네! 그리고 어머니랑 어릴 때부터 친했다는데 결혼식도 오고 장례식 때도 왔었다고 하던데요. 어릴 때 엄청 친한 언니 동생 사이였다고 아버지랑 어머니랑 셋이 밥도 먹고 친했었다고 가서 물어보면 기억할 거라고 했어요. “
” 뭐? 진짜?! 너희 엄마랑 어릴 때부터 언니 동생 하던 고향 사람이면…. 아! 혹시 너희 담임 선생님 성함이 영화 아니냐? 박영화?”
” 맞아요. 우리 선생님 이름이에요. 아버지 아세요?”
” 이야~ 진짜 영화 걔가 너희 담임 선생님이란 말이야?! 그럼 알지~ 너희 엄마랑 어릴 때부터 엄청 친한 사이였어. 이웃집 살면서 언니 동생 하면서 엄청 챙겨줬다고 아버지랑 결혼하고 나서도 너희 엄마가 자기에게는 친동생 같은 애라며 서울에서 혼자 공부할 때 챙겨준다고 밥도 종종 사주고 그랬거든.
그래서 나랑도 자주 식사도 하고 너 어릴 때는 우리 집에도 놀러 오고 그랬었는데 너희 엄마 장례식 때도 왔었고. 그런 영화가 너희 담임 선생님이라니! 세상에 이런 우연이 다 있나~! 거참 희한한 일이구만! 이렇게 다시 보니까 너무 반가운데 목요일에 아버지 쉬는 날이니까. 같이 인사나 드리러 가자! 아유! 거 참~ 괜히 아버지 온다고 하면 부담 느낄 수도 있으니까~ 그냥 말하지 말고 가자”
저는 마치 간식이라도 받은 강아지처럼 기분이 좋아졌어요. 새 학년 담임 선생님이 우리 부모님과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니 그것도 돌아가신 저희 어머니랑 어릴 때부터 친한 사이라니 다시 생각해도 너무 신기한 인연이더라구요. 혹시 운명이라는 게 있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빨리 아버지랑 같이 선생님을 놀라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었어요. 어머니와의 추억이 있는 선생님을 만날 생각에 아버지 역시도 굉장히 들떠보였어요.
어머니를 기억하는 사람을 만나는 건 정말 오랜만이거든요. 고향에서도 떠나오고 제가 태어나 자란 곳은 곳에서도 이사를 오면서 지금 사는 곳 주변에는 저희 어머니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이틀 뒤 ,그날은 아버지가 일을 쉬는 날이라 아침에 같이 나갈 채비를 했어요. 아침 일찍 선생님께 드릴 주스 한 박스를 사고 저를 오토바이 뒤에 태웠죠.
둘이 깜짝 방문을 하면 선생님이 얼마나 놀랄까 이야기를 하면서 저희는 잔뜩 설레며 학교를 향해 갔어요. 신이 나서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면서 학교를 향하던 중 오토바이 뒤에서 오렌지 주스에 조금씩 덜컹거릴 때마다 부딪치는 소리마저 아름다운 음악처럼 느껴졌어요.
신나게 달려 학교에 거의 도착할 때쯤이었어요. 사거리에서 신호가 바뀌어서 건너가는 중 저희 오른쪽에서 갑자기 웬 자동차가 순식간에 오토바이로 달려들었어요.
피할 새도 없이 “어?!”라고 놀라는 사이 이미 차는 저희를 들이받고 ‘끼익’ 사나운 소리를 내면서 미끄러지고 있었고, 저랑 아버지는 몸이 붕 뜬 채 거의 50미터 이상을 날아갔어요.
마치 누군가 화면을 느리게 재생이라도 한 것처럼 오토바이와 아버지 제가 하늘 위를 붕 떠서 날아가는 게 보였어요. 그리고 순식간에 아버지 그리고 하늘을 날던 오토바이는 바닥에 굉장한 소음을 내면서 떨어져 나 뒹굴게 되었죠.
‘퍽!’하는 소리와 함께 주변에선 누군가 소리를 지르는 게 들렸어요. 바닥에 떨어져 구르면서 어지럽고 뿌옇게 보이는 시야로 더 멀리 날아간 오토바이와 아버지가 보였어요.
떨어져서 구른 이후 아무런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죠 저는 차의 경적과 사람들의 비명을 들으면서 정신을 잃었어요. 서서히 주변의 소리를 들으며 잠깐 눈을 감았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깨어났을 때는 처음 보는 천정이 보였어요.
주변의 풍경도 모두 낯설었고 온몸에 붕대를 감은 제 모습도 이상했어요. 팔다리는 물론 얼굴의 감각조차 제 것 같지 않더라구요. 주변의 풍경부터 제 몸까지 어느 하나도 현실성이 느껴지는 게 없었어요. 겨우 눈을 뜨자 옆에선 누군가…
“눈 떴다! 괜찮니? 괜찮아? 정신이 좀 들어?”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온몸이 너무 아프고 굳은 느낌이라 고개를 살짝 돌리는 것조차 힘들었어요. 누구냐고 묻고 싶었지만 아주 오랫동안 입을 움직여 보지 않은 사람처럼 차마 떨어지지 않더군요. 목소리조차 나 나오지 않는 것 같았어요.
곧이어 간호사님과 의사 선생님이 오시는 게 느껴졌어요. 제 눈꺼풀을 들어서는 불빛을 비춰보고 다급하게 상태를 살피더라구요. 그러더니, 다행히 별다른 이상은 없는 것 같다며 이제 정신이 깬 것 같다고 하니 가까이에서 다시 안도하는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제대로 고개를 돌려 무슨 일인지 주변을 둘러보고 싶지만 이상하게 몸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더라구요. 그러자 제 시야로 갑자기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어요.
” 깼어? 괜찮아? 몸은 좀 어때? 맞다.. 선생님이 바로 말하기는 어려울 거라고 하셨는데… 일단 물 좀 줄까? “
누워있는 제 눈에 들어온 건 담임 선생님이었어요. 선생님이 왜 여기 계신지 감도 오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언제 그렇게 되었는진 모르겠지만, 순식간에 다시 잠이 들어 잃어버렸어요.
그리고 얼마가 지났을까? 한참이 흐른 것 같아요. 다시 눈을 떴죠. 다시 눈을 뜨니 병상 옆 의자에 앉은 채로 잠들어 있는 담임 선생님이 다시 보였어요.
“서…선..생..님..”
저는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냈어요. 친구들이랑 몇 시간을 체육대회 응원하느라 목이 쉬었을 때도 이렇게 목소리가 안 나오지 않았는데 참 희한했죠.
그런데 그렇게 희미하게 낸 목소리를 선생님이 들었는지 아니면 선잠을 자고 있었던 건지 깜짝 놀라면서 다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달려오셨어요.
가까이 오셔서 저를 살펴보시더니, 다시 밖으로 나가서 의사 선생님을 불러왔죠 다시 오셔서 몇 가지 체크를 하시고는 나가셨고 제 손짓에 침대를 살짝 일으켜 주었어요.
” 여기 병원이야. 기억나?”
” 아니요…”
혹시 사고 났던 건 기억나 오토바이 타고 가다가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졌는데 순간 꿈인지 어디서인지 모를 곳에서 몇 번이나 반복했었던 사고 장면이 다시 떠올랐어요. 그리고 장면에서 바닥에 떨어지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죠.
” 아버지는… 너희 아버지가… 하…그게…”
선생님은 아버지 이야기에 갑자기 난감한 표정을 지었어요. 뒤에 어떤 말이 나올지 자연스럽게 예상은 됐지만 그래도 아니기를 바랬어요. 중환자실에 있다거나 지금 수술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를 바랬죠.
그런데 선생님은 무거운 얼굴로 말을 꺼내기 어려운 듯 우물쭈물하더니, 제 옆에 가까이 와서는 붕대를 감지 않은 팔에 쓰다듬으면서 천천히 사고 이후의 이야기를 해주기 시작했어요.
“그날 등원하던 중에 사고가 크게 났어..신호를 잘 잘못 보고 급발진하던 지나던 차와 부딪혔는데 운전자도 자리에서 사망했어. 그리고 너는 크게 다쳐서 병원으로 이송이 되었고 피를 너무 많이 흘리고 차에 부딪힌 충격과 바닥에 떨어지면서 다리의 양쪽이 모두 크게 다쳤어..
외에도 여기저기 타박상이라 팔에 금도 갔고… 그래서 꽤 오랜 시간 수술에 들어갔어 흘린 피의 양이 많아서 수술을 하는 동안에도 여러 차례 위험한 고비들이 있었고, 그리고 아버지는 그 머리를 크게 다쳐서 병원으로 옮겨지고 급하게 수술에 들어갔는데 결국 회복을 못하셨어 수술은 잘 끝나지 못하고 병원에 도착해서 몇 시간 만에 결국 돌아가셨어..
너는 수술 후에도 안정을 찾지 못해서 계속 정신을 잃은 상태였고 그렇게 잠들어서 사고 이후 오늘이 벌써 1주일째야 이틀 전에 5일차쯤 한번 정신이 많이 들었던 것 같은데, 금방 다시 잃더라고. 그리고 오늘 다시 깨어난 거야.
그 사이에 니가 깨어날지 아닐지 알 수 없어서 내가 대신 아버지 장례 절차를 진행했단다.. 또 다리를 많이 다쳐서 한동안은 재활을 받아야 할 거야. 다시 걸을 수는 있겠지만, 완전히 제대로 걷지는 못할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재활로 어느 정도까지 회복되는지는 너에게 달렸다는구나… 미안하다… 이런 소식 전하게 되어서…”
솔직히 말하면 믿어지지 않았어요. 너무 충격적이라 이야기들이 귀에 들어오지 않더라구요. 선생님이 말하는 목소리를 듣고는 있지만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고 할까요? 그냥 귀에 들려오는 소리일 뿐 어떤 단어도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사고 수술 아버지 장례식 등 몇 가지 단어들이 제 눈앞에 둥실둥실 떠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었죠. 단어들이 둥실둥실 떠올라 제 눈앞에 떠다니더니, 갑자기 얼굴에 뭔가 뜨거운 게 느껴졌어요.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고 있더라구요.
울먹이면서 이야기를 하던 선생님도 결국은 참을 수가 없었는지 같이 눈물이 터졌어요. “이 안타까운 애를 어쩌니..” 하면서 말이죠.
그리고 제가 수술하는 내내 자리를 지켰고 병원비와 장례 비용까지 모두 부담하셨다고 하더라구요.
간호사님들은 오실 때마다 학교 선생님이 학생을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다니 정말 대단한 분이라며 칭찬을 늘어놓으셨죠.
” 선생님 사고 소식 듣고는 바로 뛰어오셨나봐.. 얼굴이 무슨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새하얗게 되어서는…그 후에도 맨날 오셔서 밤새고 다시 출근하시고 그랬어. 진짜 지극정성이었어. 너 정말 선생님께 잘해야 돼! “
물론 제 수술비부터 저희 아버지 장례까지 대신 치러준 선생님이 고맙지 않은 건 아니었어요.
그런데 뭐랄까 자꾸만 제 마음속에 어떤 응어리가 훅 하고 치고 올라오는 느낌이었죠. 뭐라고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주변에서 자꾸만 선생님이 얼마나 고마운지 말할 때마다 자꾸만 “아니야” 하는 반항심 같은 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간호사에게 제 속마음을 툭하고 뱉어버렸죠.
“뭐가 고마워요? 선생님 때문에 우리 아버지 죽은 건데?!”
저도 모르게 그런 말을 뱉고 나서 깜짝 놀라고 말았어요. 그리고 이야기를 들은 간호사님도 순간 너무 놀라서 저를 쳐다보고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었죠. 저 역시 그다음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어요.
그냥 제 마음속에 담아두려고 했던 나쁜 생각 중 하나였는데 갑자기 튀어나와 버린 거였거든요. 입 밖으로 내뱉을 생각이 없었던 그런 말이었어요. 그런데 물은 엎질러지면 주워 담을 수 없고 한 번 뱉은 말도 다시 되돌릴 수가 없잖아요. 이미 이렇게 뱉어버렸으니 어쩔 수 없었죠.
” 사실 우리 담임 선생님 돌아가신 어머니랑 어릴 때부터 친한 사이였어. 아버지랑도 젊을 때부터 알던 사이였구 우리 부모님 결혼식에도 왔었고 어머니 장례식에도 왔었다는데 이름 듣고는 아버지가 한 번에 누구인지 알더라고…
그러면서 너무 반갑다고 너희 어머니가 진짜 많이 아끼던 동생이었다고 어떻게 이렇게 니 담임 선생님으로 만나냐고 반가워하면서 보러 가자고 깜짝 놀라게 해주자고 그래서 그날 주스 사들고 아버지랑 같이 담임 선생님 보러 가다가 사고가 난 거야. 내가 담임 이야기만 아버지한테 말 안했어도 그런 사고도 돌아가시지 않았을텐데..이 사고는 다 담임 때문이야! 담임 때문에 담임만 아니었으면…”
솔직히 사고는 운전자의 잘못이었죠. 담임 선생님은 아무런 죄가 없어요. 그런데 어린아이들이 그렇잖아요. 아니 어린아이들이 꼭 아니더라도 마음이 너무 아플 때면 그렇죠.
지금 이 상황을 원망하고 싶고 그러기 위해서 미워할 누군가가 필요하고.. 그때 저는 그저 마음이 너무 아파서 제 마음의 아픔을 쏟아낼 누군가가 필요했던 거예요.
이런 일이 벌어진 이유를 탓하고 싶은 누군가가 친구는 위로할 말도 차마 찾지 못해서 제 곁에서 말없이 이야기를 들어주다가 조만간 또 오겠다면서 자리를 떠났어요.
저는 한참을 더 울다가 또 지쳐서 잠이 들다가 다시 일어나면 울기를 반복했죠. 아무것도 하기 싫었어요. 아니 살아 있는 것조차 싫었어요. 차라리 아버지를 따라서 세상을 떠났다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나쁜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같은 사고로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고 저만 살아남은 것도 죄스러웠고 부모님 없이 졸지에 고아가 된 것도 싫었어요. 학교가 끝나면 담임 선생님이 찾아왔어요.
그날 공부한 내용을 요약한 것과 숙제를 들고 말이죠. 제 이야기가 학교 전체에 퍼졌는지 다른 선생님들도 수업을 듣지 못하는 동안 뒤처지지 않도록 자료를 만들어 주었다고 하더라구요. 선생님은 매일 웃는 얼굴로 공부할 것들을 들고 찾아와 저를 보살펴주었어요.
늦은 밤까지 곁에서 공부와 숙제를 도와주고 제가 밥 먹는 것부터 화장실을 가고 씻는 것까지 도와준 다음 집으로 돌아갔어요. 그리고 다음날 또 찾아왔죠.
퇴원을 한 후 집에 있을 때도 선생님은 저를 찾아왔어요. 하지만 저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가지고 온 공부와 숙제도 거들떠 재활치료에 가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멍하니 앉아 있기만 했죠. 사실은 선생님의 노력과 보살핌이 고마웠어요.
부모님도 가족도 없어 다리까지 다친 저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그런데 피도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선생님이 저를 위해 그렇게나 애써주시니 고마운 마음이 컸죠. 하지만 한편으로는 선생님을 볼 때마다 사고의 기억이 떠올라 괴롭기도 했어요. 그러다 보니 선생님을 보는 게 불편했어요.
고마운 마음과 미움이 같이 떠올랐으니까요. 보호자가 없는 저는 시설에 들어가야 했어요. 그리고 혹시나 아직 몸도 성치 않고 마음의 상처도 깊은 죄가 다른 곳에서 적응하는 게 힘들까 봐 선생님은 근처에 좋은 보육시설을 알아봐 주었어요.
선생님이 다니던 성당에서 운영하는 시설이었는데. 원래는 당분간 새 새로운 아이를 받지 않고 있었다고 해요. 그런데 선생님이 간절히 부탁을 해 특별히 제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고 하더라구요.
그 덕분에 저는 전학을 가지 않고 원래 다니던 학교를 계속해서 다닐 수 있었어요. 한동안 방황하던 저는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어요. 전부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때 아버지가 떠오르더라구요.
지금 이런 내 모습을 아버지가 보면 뭐라고 하실까 싶더라구요. 내가 이렇게 다 포기한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이제 나에게는 부모님도 가족도 없는데 내 인생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더라구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포기하지 않고 저를 키운 아버지를 떠올리며 나도 힘을 내야겠다. 싶었어요. 지금 제 모습을 보면 나 때문에 우리 딸이 저렇게 망가지다니 내가 세상을 떠나서 이런 생각을 하면서 가슴 아파하실 것 같았거든요.
부모님을 위해서 나를 위해서 노력하자 싶었어요. 그래서 다시 이 악물고 공부를 따라갔고 재활도 열심히 하기 시작했어요. 여전히 그동안 선생님은 저를 위해 애써주셨고 마음이 너무도 고마웠지만 한편으로는 아직도 사고에 대한 원망을 완전히 용서하지 못해 마음이 괴로웠어요.
그러던 중 졸업을 얼마 앞두고 선생님이 저에게 좋은 소식이 하나 생겼다고 하더라구요.
” 내가 아는 선배가 있는데, 사람이 굉장히 부자야. 그래서 혹시나 해서 니 이야기를 슬쩍 해봤는데~ 그렇게 재능있는 아이가 있냐면서 도와주고 싶다고 하더라고. 선배가 예전부터 장학재단 같은 것도 운영하고 공부 잘하는 친구들에게 관심이 많거든. 인재양성에 힘쓴다고 해야하나? 아무튼 그래서 그분이 니 후원자로 대학 졸업까지 모든 학비를 지원해주고 싶다고 하는 하는데 어떠니? 정말 좋은 기회 같은데~ “
정말 좋은 기회다 싶었어요. 앞으로 대학 졸업 때까지 지원받을 수 있다니 너무나 좋은 기회였죠. 그리고 한편으로는 후원자가 생기면 선생님도 이제 안심하고 나를 더 이상 찾아오지 않겠지 싶은 생각도 들었어요.
선생님을 보는 제 마음도 괴롭지만 이렇게 저를 위해 애쓰는 선생님도 너무 힘들 것 같았거든요. 이쯤에서 각자의 길을 가는 게 서로를 위한 거라는 생각도 들어 저는 흔쾌히 후원을 받기로 했어요.
그렇게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선생님과의 인연도 자연스럽게 끝이 났어요.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저는 후원자분 덕분에 편하게 공부를 할 수 있었어요.
보육원의 다른 친구들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자립을 준비하는 동안 저는 공부에 집중을 할 수 있었죠. 병원 비용과 약간의 용돈까지 보태주셔서 재활도 무사 잘 맞힐 수 있었고, 오래 걸으면 다리를 약간 절기는 하지만 평소에는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걷게 되었어요. 그렇게 되기까지 무려 2년이 넘는 노력이 필요했죠.
이 악물고 공부를 한 덕분에 고등학교 입학 후 전교 1등을 놓친 적이 없어요. 저는 항상 성적표를 복사해서 후원자분에게 전달을 부탁했어요. 연락은 항상 보육원 원장님이 대신 해주었거든요.
후원자님이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며 익명으로 남기를 원하셨다고 해요. 그래서 직접 연락을 하지도 만날 수도 없었어요. 그래서 저는 학교생활이나 성적 등을 편지에 써서 원장님에게 대신 전달을 부탁드리고는 했죠.
고등학교 입학부터 졸업까지 정말 치열한 3년을 보낸 덕분에 저는 의대에 입학을 했어요. 의사라는 꿈이 원래 있던 건 아니었는데 어머니도 병으로 세상을 떠나시고 아버지랑 저도 크게 다치고 나니 그쪽으로 관심이 생기더라구요.
내가 더 많이 공부하고 노력하면 한 생명을 더 살릴 수 있는 기회가 오지 않을까? 다른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가족을 건강하게 다시 만날 수 있도록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래서 공부를 다시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의대를 꿈꾸게 되었고 많은 학교 중에서도 가장 좋은 곳에 가기 위해서 이 악물고 애를 썼죠.
제가 의대에 입학했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잘 됐다면서 후원자님이 선물을 보냈더라구요. 성인이 되면 필요하다면서 원피스와 파우더.립스틱 구두.가방 등 머리부터 발끝까지 꾸밀 수 있는 세트를 보내주었어요.
교복 대신 옷과 화장품을 받으니 그제야 내가 이제 어른이 되는구나. 실감이 나기 시작하더라고요. 이후에도 학비 외에 용돈을 꾸준히 보내주었어요.
여전히 연락은 수녀님을 통해서 주고받을 수 있었어요. 후원자는 대체 어떤 분일지 몇 년 동안 궁금증만 남겼죠. 대학 졸업까지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해 주었고 이제 학교를 마쳤으니 후원자분과의 인연도 여기까지인가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 한 번만 만날 수 없겠냐고 간절히 요청을 드렸죠. 약간의 기대를 하면서 답을 기다렸지만 여전히 그쪽에서는 이대로 익명의 후원자로 남고 싶다고 답을 전해왔어요.
아쉬움이 너무나 컸지만 그래도 후원자님 덕분에 제가 공부도 하고 대학도 다니고 꿈꾸던 의사도 될 기회도 생겼으니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으로 감사를 대신해야겠다 싶었죠.
그래서 역시 누군가를 후원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 된다면 그때는 같은 자리 서로를 알아볼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해봤구요. 더 이상 후원을 받을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 생일에는 항상 작은 선물을 전달해 주고는 했어요.
저도 이제 돈을 벌기 시작했으니 명절에 작은 답례를 보내기도 했죠. 그렇게 작은 정을 주고받게 된 지도 어느새 5년이 지날 즈음 6년째 생일에 갑자기 선물이 오지 않더라구요.
매년 생일을 한 번도 잊지 않았던 분이었는데.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었지만 소식을 알 곳이 없었어요. 그런데 생일이 지나고 며칠 뒤 갑자기 전화 한 통이 왔었는데 생전 처음 보는 번호였어요.
” 안녕하세요. 경지원 씨 연락처 맞죠?”
” 네. 맞는데 혹시 누구세요? “
” 아… 그게 혹시 예전에 후원을 받은 적이 있으시지 않나요?”
” 맞아요. 혹시 후원자님 이세요?”
” 아.. 아니요. 제가 당사자는 아니고 그동안 후원해 준 주셨던 분의 아들입니다. 얼마 전 돌아가시면서 지원 씨 앞으로 유서를 남기셔서 전달해 드려야 할 것 같아요. 시간 되시면 혹시 제가 전달해 드리는 주소로 한번 찾아주실 수 있을까요? “
시간이 많이 흘러 이제 후원자와의 관계도 슬슬 정리되는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돌아가셔서 올해 생일은 챙겨주지 못하신 거였더라구요. 너무 놀라 저는 전달받은 주소로 바로 달려갔어요.
이미 세상을 떠나셨다고 하지만 늦었어도 지금이라도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었거든요. 도착하니 와…영화에서나 보던 커다란 저택이더라구요.
도착 시간에 맞춰 문 앞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던 아드님이 문을 열며 반겨주었어요. 그리고 그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가서 저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현관을 지나 거실로 갔더니, 벽면의 가족사진에 아주 익숙한 얼굴이 있었거든요. 단란한 가족으로 보이는 사진 속에는 중학교 2학년 제 담임 선생님이 웃고 있었어요. 방금 저를 맞아준 아들분이 선생님의 옆에 웃으며 있었고, 그 옆에는 남편으로 보이는 남자분도 있었죠.
” 궁금한 게 많으실 거예요. 모든 답이 다 나와있진 않지만 그래도 어머니가 남긴 편지를 보면 지금 상황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
저는 선생님이 아들이 건네주는 편지를 받았어요. 하지만 차마 열어볼 용기가 나지 않더라구요. 편지를 든 채 손을 바들바들 떨며 자리에 못이 박힌 데 서 있었더니, 그분이 저를 거실 가운데 소파로 안내해 자리에 앉도록 해 주었어요. 그리고 시원한 물도 한 잔 내어주셨죠.
저는 여전히 편지를 준 채 손을 떨고 있었어요. 하지만 계속 그렇게 있을 수는 결국 용기를 내어 편지를 열어봤죠. 그리고 편지를 읽을수록 눈물이 멈추지 않았어요. 다 읽을 때쯤엔 어느새 제가 오열을 하고 있었죠.
“지원이에게
안녕 지원아~ 오랜만이지? 사실 나는 오랜만이 아니기도 해~
이 편지를 읽고 있다는 것은 아마 내가 세상을 떠나고
너에게 내 마지막 뜻을 전달해 달라는 부탁이 이루어진 거겠지..
지금 아마 많이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울 테니 먼저 설명이 필요하겠구나..
어릴 때 선생님은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았어.
너희 어머니랑 이웃집에 살면서 우리가 가까워진 것은
아마 이런 점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었을 거야.
하지만 비슷한 환경에서 우리의 태도는 아주 달랐어
잔소리만 하는 아내와 돌봐야 하는 딸이 지겨워 집을 나간 아버지
나를 낳아준 아버지에게도 사랑받지 못한다며
매일 울면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그런 나에게 힘이 되어 준 건 너의 어머니였어..
나는 어릴 때부터 언니라고 부르던 게 편해서 그렇게 부를게~
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어머니와 지내고 있었지만 한 번도 좌절하지 않았어.
주변에서 아버지 없는 애라는 놀림을 받으면 오히려 당당하게 고개를 들었지
아버지 없이도 자기는 반듯하고 성실하게 자랐다며
자신을 놀리는 친구들 기를 팍 죽이고는 했어.
그리고 나에게 그런 긍정적인 기운을 나눠주었지
“너라는 보석이 얼마나 빛날지 모르고 집을 나간 아버지가 오히려 안타깝다”
언니가 늘 나에게 해줬던 이야기야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얼마나 힘이 났는지 몰라
내가 선생님이 되기로 했던 것도 언니 덕분이었어
언니의 꿈이 선생님이었거든.
선생님이 되어 언니와 함께 아이들을
좋은 방향으로 영향으로 이끄는 미래를 상상하며 공부했지
비록 언니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생활이 더 어려워져서 대학에 가지는 못했지만,
나라도 대신 꿈을 이뤄주고 싶었어
그 후 우리 어머니는 좋은 남자를 만나 재혼했고
새 아버지는 심성도 고왔지만 굉장히 부유한 집안의 아들이라
물려받은 재산이 어마어마했어.
그 덕분에 나 역시 어느 날 갑자기 부잣집 딸이 되었지
상황이 나아졌어도 내가 가장 어두웠던 시절.
곁을 지켜주었던 언니에게 나는 늘 고마웠어
나에게는 은인이자 어둠 속 빛 같은 사람이었거든.
그런 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나도 마음이 많이 아팠어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싶었지만…
너희 아버지는 혼자서도 잘 키울 수 있다며 마음만 받겠다고 웃었지
그리고 후로 연락이 소원해졌는데..
몇 년 만에 다시 학교에서 담임과 제자로 너를 만나게 된 거야.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단다…
고왔던 언니를 뚝 닮은 너의 모습을 보며 내가 얼마나 기뻤는지…
하지만 우리가 다시 만난 운명이 너를 불행하게 만들 줄은 몰랐어..
니 마음을 그렇게 아프게 할 줄 알았다면…
나는 그때 아는 척을 하지 않았을 거야.
그때 내가 괜히 고향에서 친한 사이였다고 말해서 너를 불행하게 했구나…
선생님은 그날을 몇 번이나 후회했어. 너를 도와주고 싶었지만
나를 볼 때마다 니가 괴로워한다는 사실을 알았어.
우연히 아이들끼리 이야기를 하면서
너희 아버지가 나를 만나러 오다가 사고가 났다는 것을 듣게 되었거든.
이야기를 듣고 내가 얼마나 후회했는지…
이 모든 상황이 내 말 한마디로 일어났구나 싶어 며칠을 잠도 못 자고 괴로워했단다
물론 그때 내가 괴로워했던 마음이 나 때문에
아버지를 잃은 니 슬픔만큼 힘들지는 않았겠지
너를 물심양면 돕고 싶었지만 나를 볼 때마다 괴로워할 것 같아
이후에는 차마 나설 수가 없더라…
그래서 아는 선배가 후원하기로 했다는 거짓말로 니 뒤에서 너를 돕기로 했어.
그 후로 나는 너의 그림자 후원자가 되었고…
고맙다며 한 번쯤 만나고 싶다는 니 연락이 올때면
지금이라도 사실을 말하면 어떨까.. 몇 번을 고민했지만,
괜히 열심히 공부하고 다시 마음을 다잡은 너를 흔들게 될까 봐
계속해서 숨기기로 했단다.. 그런데 이미 후원도 다 지난 후
너에게 사실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마지막으로, 너에게 주고 싶은 선물이 있기 때문이야
남편도 몇 해 전 세상을 떠났고 아들 몫으로도 충분히 남겨두었어
그리고 나머지는 너를 위해 남겨주고 싶어 내 연락이 달갑지 않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마지막에 다시 너에게 편지를 쓰게 되었단다…
평생을 너에게 이게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온 나의 마지막 참회라고 해야 할까?
이걸로 너의 어린 시절을 아버지를 다시 살릴 수는 없지만,
이렇게라도 사죄를 하고 싶은 내 마음을 부디 이해해 주렴 지원아…
너무 늦었지만 그리고 직접 얼굴 보고 하지도 못했지만, 정말 미안했다.
나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을 잃게 해서…
그리고 큰 수술을 받고 아픈 다리로 살게 해서 정말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그래도 포기하지 않아줘서…
멋지게 다시 일어나 꿈을 이루며 빛나는 삶을 살아줘서 정말 고맙다… “
” 저희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까지 죄책감에 정말 힘들어했어요. 나 때문에 사랑하는 언니의 딸이 소중한 내 제자가 아버지를 잃게 되었다고 평생 완전히 고쳐지지 못하는 다리로 살아야 한다고 늘 무거운 죄책감을 가슴에 얹고 사셨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해야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동안 어머니가 얼마나 죄책감으로 힘들어 하셨는지 알아서 차마 반대할 수가 없더라구요.
그래서 저도 동의했어요. 지원 씨 앞으로 유산을 남기겠다는 어머니 의견 들어드릴 수밖에 없었어요. 제가 감히 용서하라 말라 이야기할 수 없지만, 그래도 어머니 부탁 한 번쯤은 부디들어주세요. 저희 어머니 이제는 무거운 죄책감 조금이나마 내려놓을 수 있게 도와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선생님은 사고 이후 돌아가시기 전까지 죄책감으로 아주 많이 힘들어했다고 하시더라구요. 아들분까지 간곡하게 부탁하니 저도 차마 자리에서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유산을 상속받기로 했는데 무려 20억이나 제 앞으로 남기셨더라구요.
후원자가 선생님이라는 사실에 놀라고 제가 어릴 때 뱉었던 철없는 도끼 어린 말을 전해 들었다는 것도 놀랐는데 20억이라는 큰돈을 채 앞으로 남기시다니….그날은 정말 놀랄 일이 끝이 없었어요. 증여세를 내고도 제 기준에는 엄청난 재산이었어요.
사실 그렇게나 큰돈이 저에게는 필요하지는 않아 더욱더 고민이었죠. 그래서 선생님이 남겨주신 돈으로 저는 같은 길을 걸어가기로 했는데요. 선생님이 그랬던 것처럼 어려운 환경에 있는 친구를 찾아 그림자 후원자가 되었어요.
그 후 3년째 지금 그림자 후원자로 아이 5명을 후원하고 있는데요. 아이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니 왜 선생님이 제가 꿈을 이루게 된 것이 고맙다고 이야기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리고 너무 늦었지만 선생님 모신 곳을 찾아가 역시 사과와 감사함을 전했는데요. 남겨주신 마지막 편지로 선생님의 진심이 답 제가 전한 인사도 부디 계신 곳까지다 이제는 마음이 편해지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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