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저는 60대 중반의 남자입니다. 20대 중반에 저희 지역에서 가장 큰 시장에서 이것저것 나르며 배달 일을 하던 저는 우연히 들른 식당에서 서빙을 한 여자를 보게 되었습니다.
무뚝뚝한 표정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저는 숨이 먼는 줄 알았습니다. 너무 예뻤거든요. 그래서 그날 이후 매일 보러 갔습니다. 보고 싶어서 어쩔 줄을 모르겠더라구요. 하루라도 보지 못하면 정말 큰일이 날 것 같다는 생각에 매일 보러 갔습니다.
그 여자가 제게 말을 걸어주거나 저랑 눈을 맞춰주거나 그런 것도 아니었습니다. 매일 제일 저렴한 비빔밥, 김밥을 먹는 그냥 단골손님 이상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원래도 친절하지 않은 사람이었고 손님들과 눈도 마주치지 않는 사람이라 제 얼굴도 몰랐을 겁니다. 하지만 인연은 저희 둘을 그냥 지나치게 두지 않았습니다.
저희 지역에 성당과 붙어있는 규모있는 보육원이 있었습니다. 배달을 하다보면 보육원은 간간이 들리던 곳이었는데. 갈 때마다 십자가를 향해 손을 모으고 괜히 기도를 하곤 했습니다. 잘 먹고 잘살게 해달라며 기도했었죠.
성당 안에 들어가지도 않고 입구에 서서 어설프게 기도하는게 다였지만 종교가 없는 제게는 나름 의미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날도 그렇게 기도를 하고 보육원 주방에 배달거리들을 놓곤 돌아서는데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렸습니다. 다른 때라면 그냥 갔겠지만, 그날은 월요일이라 쉬는 날인데 급한 배달이라고 요금을 더 받고 온터라 시간 여유가 있어 뭐가 그리 재미있나 싶어 돌아보니 여러 어른들이 아이들 이불을 빨고 계시더라고요.
커다란 대야에 이불들을 넣고 꼭꼭 밟고 짜고 널고 있었습니다. 봉사하는 사람들이구나 대단하다라고 생각하고 돌아서려는 순간 제 눈에 들어온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비빔밥집 여자였죠. 식당에서와 달리 환히 웃으며 아이들과 장난도 치고 이야기도 나누며 빨래를 하고 있었습니다. 안 그래도 예쁜 여자가 웃기까지 하니 정말 천사 같았습니다.
너무 예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자리에 서서 멍하니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있는데, 여자가 저를 보는 바람에 눈이 마주쳐 버렸습니다.
온몸이 굳더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허둥지둥대고 있는데, 여자 제 쪽으로 걸어오더군요. 그러더니, 환히 웃으며
“봉사하러 오셨어요? 이쪽으로 오실래요?”
라며 저를 이끌더군요. 아니라고 해야 하는데 아니라고 하지도 못하고 그 여자가 이끄는데로 끌려가 빨래가 끝난 이불을 비틀어 짜기도 하고, 널기도 하며 일을 도왔습니다.
갑자기 일을 하면서도 여자가 저를 향해 웃는게 더 중요했습니다. 한 두세시간쯤 그러고 있다가 정신이 들어 돌아가려는데 여자가 다가와
” 2주에 한 번 월요일마다 이렇게 모이고 있어요. 다음에도 시간 나시면 오세요^^ “
라면서 저를 웃으며 배웅했습니다.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정도로 좋았습니다. 그 여자가 저를 좋다고 한 것도 아니고 알아보고 아는 척을 한 것도 아닌데도 여자와 말 한마디 나누었다는 자체가 좋았습니다. 그래서 2주 뒤에 보육원으로 향했습니다.
” 나오셨네요. 감사합니다 “
라고 말하더라구요. 저는 어쩔 수 없이 그때부터 보육원 봉사를 부지런히 나갔습니다. 그런데 가다 보니 아이들이 예쁘더라고요. 처음엔 낯설어 곁만 맴돌던 아이들이 얼굴을 익히자 해넓게 웃으며 따라다니고 조잘거리기도 하고, 이것저것 묻기도 하는 모습이 귀여웠습니다.
얼른 장가가서 이런 예쁜 아이를 낳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그 여자는 아이들을 정말 살뜰히 보살폈습니다. 마치 아이들의 큰 누나라도 되는 것처럼 이 아이 아이 고루고루 잘 보살피더라구요. 그렇게 하길 세 달쯤 되었을 때 봉사가 끝나고 한 분이
“우리 오늘은 뒤풀이 좀 하고 헤어질까요? 다들 맥주 어떠세요?”
라고 하면서 동네 호프집으로 자리를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다들 한 동네에서 일하고 살다보니 아는 얼굴도 있고 아주 낯선 얼굴도 있더군요. 거기서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자기소개를 네 번째쯤 했을 때 여자 곁에 앉을 수 있었습니다.
심장은 쿵쾅거리고 술 기운은 점점 올라 얼굴은 뻘개져서 꼴이 말이 아닌 모습이었던 저는 고개도 제대로 못 들고 있었습니다. 부끄러웠거든요. 그런데 여자는 저를 보고 웃더니,
“저 모르세요? 저는 아는데 먼저 아는 척하기 창피해서 못했어요. 비빔밥 좋아하시는 분 맞으시죠?”
라고 하더군요. 심장은 더 거세게 뛰고 얼굴은 더 달아올라 뭐라고 대답을 못 하고 있는데,
“제가 식당이랑 여기랑 너무 다르죠? 식당에서는 괜히 오해 사기 싫어서 일부러 그래요. 자꾸 오해하시는 손님들이 있어서 식당을 옮겨야 할 때가 있었거든요. “
씁쓸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여자의 말을 듣고 보니 여자의 무뚝뚝한 표정이 이해가 가더라고요. 그래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자
“제가 좀 가벼워 보이나 봐요. 제 탓이죠. 그런데 여기는 오면 아이들이랑 있다보면 안 웃을 수가 없어요. 같이 봉사하시는 분들도 모두 점잖으시고 젊은 사람이 저희 둘뿐이잖아요. 처음 오셨을 때 얼마나 반갑던지”
라며 까르르 웃더군요. 아마 술에 약간은 취한 것 같아 보였습니다. 하지만 여자와 가까이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건 기적처럼 느껴졌기에 순간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군대를 제대하자마자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여기저기 막노동이다. 배달이다. 여러 일을 전전하다 겨우 정착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진 돈도 없고 오히려 고향에 남아 계시는 어머니께 돈을 붙여야 하는 형편이라 연애는 꿈도 꾸지 않았거든요. 그러다 여자를 만나고 생긴 연심은 그저 순수하게 동경의 마음이었습니다.
뭘 어떻게 되길 바라지 않았죠. 그런데 그런 여자와 가까이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게 된건 정말 꿈만 같은 일이었습니다. 저는 너무 좋았습니다. 하지만 무슨 우여곡절인지 여자는 점점 제게 아는 체를 했습니다.
비빔밥을 먹으러 가면 곁들여 나오는 육수를 큰 사발에다 주고 달걀프라이도 두 개씩 얹어주었습니다. 밥도 배로 많이 주었고요. 무뚝뚝하게 일을 하다가도 저와 눈이 마주치면 씩 웃고는 했습니다.
봉사를 가서도 제 곁에서 일을 하는 여자와 저는 점점 많은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여자도 시골에서 올라왔다는 것 부모님이 모두 살아계시고 딸 부잣집의 막내딸이라는 것, 부모가 없는 아이들이 너무 안쓰러워 봉사를 시작했다는 것, 남자들이 무대포로 들이되 피하게 되었다는 것, 자신에게 먼저 찝적거리지 않은 사람은 내가 처음이라는 것, 그래서 내가 마음에 든다는 것 등등 여러 가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저보다 나이가 3살 많은 여자는 그때부터 저를 살뜰히 챙기기 시작했습니다. 서로 어려운 처지인 것을 알았지만 둘이 힘을 합치면 더 나은 미래를 맞이할 거라고 여자가 저에게 힘을 실어주면서 우리는 연애를 시작했습니다.
쉬는 날이면 가까운 공원에가 아이스크림도 사먹고 걸으며 데이트를 했습니다. 서로 뻔히 주머니 사정을 아는지라 비싸고 좋은 장소는 못 갔지만 그저 둘이 함께라면 좋았습니다.
제가 지내는 자취방에서 라면을 끓여 먹어도 마주 보고 웃을 수 있었습니다. 그 여자의 집에가 비빔밥을 해 먹기도 했죠. 그것도 2주에 한 번 가능했습니다. 이 주에 한 번씩은 봉사를 가서 만났으니까요.
그래도 뭐가 그리 좋은지 우리는 붙어 다녔습니다. 그렇게 인연을 만난 어느 날, 그 여자는 내게
“우리 언제 결혼해? 나 이제 서른이야”
라고 하더군요. 그동안 알뜰히 돈을 모은 덕에 둘이 살림을 합칠 방은 구할 수 있었지만 결혼식은 감히 꿈도 못 꾸겠더라고요. 그래서 각자 부모님 올라오시라고 하고 아내가 일하는 식당에서 잔치 음식만 부탁해 해서 식사를 하는 것으로 결혼식을 대신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부르지도 못하고 같이 봉사하시는 분들만 모셨습니다.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제 손을 꼭 붙잡고 우리 미순이 잘 부탁하네라며 부탁을 하셨습니다.
미리 가서 허락을 받은 것도 아니었는데 그렇게 이야기해주셔서 너무 감사하더라고요. 보태준 것도 없이 결혼을 하는 막내딸 속알이 할까 봐 그러신 거였겠지만, 저에게는 너무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저희 어머니도
“아내에게 서로 위하고 살아. 그거면 됐다 “
라며 말씀하시고는 눈물을 닦으셨습니다. 항상 저만 보면 우시는 분이셨거든요. 도시 나가서 힘들게 일하는 아들한테 매달 돈 받는 것도 미안한데 장가가는데 아무것도 못 해주는 마음이 좋지 않으셨던 겁니다.
저희 누나와 처형들은 그저 잘 살아라고 말하고는 각자의 부모님을 챙기느라 바빴습니다. 사이에서 저와 아내만 신이 났죠. 같이 봉사하시는 드디어 우리 단체에서도 부부가 맺어줬다며 좋아하셨습니다.
그래서인지 축의금을 많이 주셔서 음식값이랑 장소값을 치르고도 돈이 남았습니다. 그 돈은 보육원 아이들 간식을 사서 보내기로 했습니다. 여전히 경제적으로 힘들었지만 아내와 저는 부부가 되었다는 것만으로 감사하고 기뻤습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일했고 봉사를 했습니다. 그렇게 둘이 열심히 모으다 보니 5년이 지났을 때는 작은 가게 하나를 얻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물론 시장에서 얻기는 무리였고 시장에서 약간 벗어났지만 초등학교와 시장 사이 중간 정도 되는 자리에 점포를 얻을 수 있겠더라구요.
오가는 인원이 시장보다는 적었지만 잘만 하면 아이들이 들러 먹을 수도 있고 시장에 오가는 사람들도 올 수 있는 그런 위치였습니다. 테이블을 4인이 앉을 수 있는 5개 정도 놓고 벽에 혼자 앉을 수 있는 선반을 두어 손님이 꽉 차면 26명 정도 앉을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아내는 떡볶이 가게를 열자고 했습니다. 김밥이랑 튀김 라면 같은 걸 팔면서 제가 배달도 다니고 같이 일을 하면 금방 잘 될 거라면서 우리 너무 부자되면 어쩌지라고 웃는 아내의 얼굴이 좋았습니다. 항상 웃으며 저에게 힘을 주는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렇게 우리는 분식집을 열었습니다. 음식을 조금씩 담아 시장에 돌리며 식사 때 시켜주시라고 홍보도 하고, 일부러 초등학교 앞에 가서 종이컵에 담은 떡볶이를 돌리기도 했습니다. 먹으러 오라구요.
홍보가 먹혔는지 조금씩 알려진 가게는 손님이 점차 늘기 시작했습니다. 배달 손님도 많았습니다. 매일 아침 일찍 재료를 사서 손질을 하고 음식을 만들어 점심 장사를 하고 초등학생들 하교 시간에 장사를 하고 저녁에 마무리를 할 때면 다리가 퉁퉁 부어 몸이 녹초가 되곤 했습니다.
그런데도 다음날을 위해 가게 청소를 하고 정리를 하면 피곤해서 저녁밥도 먹기 싫었습니다. 남은 떡볶이나 김밥으로 끼니를 때우는 날도 많았죠 그래도 좋았습니다. 아내와 함께라면 그저 좋았습니다.
와중에도 아내는 봉사를 꾸준히 다녔습니다. 가게를 매일 열어야 하는 상황이라 아내가 보육원 아이들 저녁 준비하러 봉사를 가는 날에는 제가 혼자서 오후 장사를 하곤 했습니다.
그러느라 저는 봉사를 가지 못했죠. 원래도 아내가 봉사를 더 열심히 했으니 아내가 대표로 다녀오는 걸로 정했던 거죠. 아내는 힘들어하면서도 봉사를 다녀오면 얼굴색이 달라지곤 했습니다. 마음이 착한 사람이라 그런지 착한 일을 하고 오면 표정이 더 좋더라구요.
아내가 없는 동안 저는 더 힘들긴 했지만, 아내가 그렇게 좋아하니 저까지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런 아내를 닮은 아이 하나만 생기면 더할 나이 이없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형편이 어렵긴 했지만, 아내와 저와의 결실이 생기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었죠. 워낙 아이들을 좋아하는 아내라 아이들을 잘 키울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여보… 나 몸이 좀 이상한 것 같아요. 병원에 가봐야겠어요”
라더니, 아침에 재료 준비를 마치고 나갔습니다. 저는 아내가 많이 아플까 봐 걱정을 하면서도 가게 문을 닫을 수 없어 지키고 있었죠. 가끔 아침을 못 먹은 이모 삼촌들이 라면이라도 시킬 때가 있었거든요. 병원에 다녀온 아내는 눈이 뻘개져서 들어왔습니다. 무슨 일이 났나 싶어
”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어디 많이 안 좋아?” 하고 물었더니,
” 나 뭐 달라진 거 없어? 요즘 나 살도 좀 찌고 배도 좀 나오고 잠이 모자라서 힘들었잖아요. 난 피곤해서 그런가 싶었는데, 임신이래요. 5개월 됐대요! “
환하게 웃는 아내를 와락 안아 주었습니다. 그간 서로 말은 안 했지만, 아내도 아이가 생기지 않아 속앓이를 했었는지 제 품에 안겨 엉엉 울었습니다.
그날부터 저는 아내의 일을 덜어주기 위해 더 열심히 일했습니다. 아내는 그런 저를 보며 자신이 할 수 있다며 괜찮다고 했지만, 저는 하나라도 더 해주고 싶어 노력했습니다.
물론 음식 간이나 양념들은 아내가 봐야 했지만, 나머지는 제가 더 하려고 애썼죠.아내가 30대 중반에 한 임신이다 보니 병원에서도 조심하라고 하셨다고 하더라구요. 아무래도 요즘보다 노산의 기준이 더 낮았던 만큼 아내의 상태를 더 살폈어야 했습니다.
임신을 알고 얼마 뒤부터 아내의 배는 점점 부풀었습니다. 저렇게 커져도 되나 싶을 만큼 커지더라구요. 얼마나 큰 녀석이 나오려고 저러나 싶었죠. 하지만 그건 좋은 징조가 아니었습니다.
병원에서는 임신중독증이라며 좀 쉬는 게 좋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혼자 해볼 테니 집에서 좀 쉬라며 아내를 가게에 나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런데도 아내는 봉사를 빼놓지 않고 다니면서
” 이렇게 착하게 봉사도 했으니까. 아이도 건강하게 잘 낳을 거예요”
라며 웃곤 했습니다. 제가 혼자 가게 일을 보고 난 후 아내의 몸 상태는 조금은 호전되는 듯 보였습니다. 머리가 아프다며 앓아 누워 있기도 하고, 소화를 못 시켜 헛구역질을 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저를 보면 웃어주려고 노력하는 아내가 너무 안쓰러웠습니다.
아이가 얼른 태어나 아내가 좀 편해지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러다 가게 정리를 마치고 집으로 가보니 아내가 배를 붙잡고 아파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들어가자 아내는 진통이 시작됐나 봐요.
아내를 부축해 병원으로 가는 내내 마음을 졸였습니다. 아내가 너무 아파했거든요. 택시를 타기 애매한 거리의 병원을 둘이 손을 잡고 걷다가 쉬다가 하며 겨우겨우 도착했습니다.
간호사는 아내를 바퀴 달린 침대에 눕히더니, 분만실로 데리고 갔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따라 들어가시고 분주한 소리가 나더니, 간호사 선생님이 다시 나오셔서는
“진통 간격이 1분이라 곧 아이가 나올 것 같은데, 산모님이 자꾸 기절을 하세요. 혹시 모르니까 자리 비우지 마시고 여기 꼭 계세요.”
라며 다급하게 다시 분만실로 들어가셨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입이 마르고 속이 타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아내의 비명소리가 들리고 소리치는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선생님들의 움직임에 뭔가 잘못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들었습니다.
차라리 제가 진통을 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기다렸습니다. 그러다 이내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얼마 뒤 간호사 선생님이 싸개에 둘둘 쌓인 아이를 데리고 나와 제게 안겨주며
” 공주님이에요. 너무 난산이라 엄마가 고생하셨어요. 지금 처치 중이고 곧 분만실에서 나오시면 만날 수 있어요.”
라는 말에 안심이 되었습니다. 아이는 한눈에 아내를 닮은 걸 알았습니다. 피부도 하얗고 눈 코 입이 다 큼직한 게 아내와 꼭 닮아 있었습니다. 그런 아이에게
” 안녕? 내가 니 아빠야~ 잘 나왔어 앞으로 잘 부탁해”
라고 인사를 하고 다시 간호사 선생님께 안겨드리는 순간 분만실에서 의사 선생님이 나오시더니,
” 아내분이 지금 혈압이 급격하게 떨어지고 호흡이 불균형하세요. 아무래도 빨리 큰 병원으로 가야겠어요. 간호사! 구급차 불러요”
라며 소리치셨습니다. 아내를 다시 만나기만을 기다렸는데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멍하니 있는데, 분만실 앞에서는 급하게 움직이는 소리만 들리고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선생님들은 더 분주히 움직이셨습니다.
무서웠습니다. 구급차가 도착했고 저는 실려 가는 아내 곁에 따라 탔습니다. 아내는 산소 호흡기를 매달고 있었고, 아이를 낳기 전보다 더 통통 부은 얼굴로 눈도 뜨지 못한 채 누워있었습니다.
그런 아내의 손을 꼭 잡았지만 아내는 제 손을 잡지 못했습니다. 아내의 손은 손가락 하나하나 안 부은 곳이 없었습니다. 그런 아내 곁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내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일뿐이었습니다.
지역에서 가장 큰 병원의 응급실에 도착한 아내는 여러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다급하게 여러 처치를 받았습니다. 저는 그런 아내가 얼른 깨어나 아이를 보러 가기만을 기다리며 처치 받는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습니다.
여러 기구들이 오고 의사 선생님이 아내의 가슴팍을 누르며 아내가 숨을 쉴 수 있게 해보셨지만 아내는 깨어나지 않았습니다. 아이를 낳으면 아이에게 입히겠다고 배넷저고리도 손수 만들어 가방에 싸놓았는데 아내는 옷을 입은 아이도 보지 못하고 눈을 뜨지 못했습니다. 응급처치를 한 의사 선생님은
” 환자분 같은 경우를 양수색전증이라고 하는데… 이런 경우 예방할 방법이 없어서….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라고 하시더니, 고개를 숙이셨습니다. 아이만 태어나면 다 해결될 줄 알았는데 아이는 태어났는데… 아내는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아이에게 주겠다며 퉁퉁 부은 손으로 일기를 쓰던 사람은 이제 세상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장례를 치르고 아이를 데리러 다시 산부인과에 가서야 저는 울었습니다.
장례식장에서 장인어른 장모님 앞에서도 울지 않았던 저는 산부인과에 가서야 눈물이 멈추지 않고 쏟아져 아이처럼 엉엉 울고 말았습니다. 아이를 데리고 나온 간호사 선생님도 차마 아이를 건네주지 못하고 서 있다가
” 아버님이 강해지셔야해요. 힘내세요. 죄송합니다.”
라며 아이를 제 품에 안겨주시더니 들어가시더라구요. 아이를 만난 어머니와 장인어른 장모님은 아내를 닮은 아이를 보고 엄마랑 꼭 닮았네라며 눈물을 보이셨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아이를 방에 누이고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 아이는 우리가 데려가겠네 자네 혼자 이 아이를 어떻게 키워…와서 보고 가고 하면되니까. 아이는 우리가 데리고 갈게”
라고 하셨고 어머니도 내심 그러길 바라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차마 아이를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집에는 아내가 만든 모빌도 있었고, 아내가 아이를 위해 지어 놓은 목화솜 이불도 있었는데, 아이를 다른 곳으로 보내서 키우고 싶지 않았습니다.
“말씀은 고맙지만 일단은 제가 해볼게요. 제가 아빤데 하죠. 왜 못해요. 엄마도 없는데 아빠까지 떨어져 지내게 할 수 없어요”
라며 말하고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또다시 엉엉 울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고개를 돌려 우셨고 장인어른 장모님은 함께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우셨습니다. 그러더니, 어머니가
” 내가 시골 생활 접고 와서 아이를 봐줄게요. 너무 나이가 많아서 내가 도움이 될진 모르겠지만, 한번 해보죠. “
라며 장인어른과 장모님을 안심시키셨습니다.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신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 그럼 우리가 자주 와볼게 “
라며 내려가셨고 어머니는
” 내가 일단 집에 가서 정리 좀 해놓고, 올 테니까. 그때까지만 좀 혼자 고생하고 있어 아휴 이게 무슨 일이라니…”
라며 눈물을 닦으며 내려가셨습니다. 어른들이 다 가시고 아이와 둘만 남게 되니 아내의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졌습니다. 아내가 있었다면 환한 미소로 아이를 안고 젖을 먹였을 텐데 저는 눈물을 흘리며 분유를 먹이고 있자니 너무 서글펐습니다.
아내는 얼마나 아팠을까? 내가 너무 부족하고 모자라 아내가 그렇게 되었다는 생각에 차라리 내가 죽고 아내가 살았어야 했다고 자책했습니다. 그런데 아이에게 분유를 다 먹이고 트림을 시켰더니, 아이가 절 보며 웃었습니다.
아직 태어난 지 열흘도 안 된 아이가 우는 절 보며 환하게 웃었습니다. 미소를 보자니 마음이 뭉클한 게 이상했습니다. 비록 아내는 잃었지만 아이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겠다는 결심이 마구 샘솟았습니다.
그 결심이 생기고 나니 아내에 대한 그리움과 죄책감은 아이에 대한 애착과 사랑으로 변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아이를 돌봤습니다. 그렇게 1주일이 지나고 어머니께 연락이 왔습니다.
집 정리를 하시고 짐을 싸시다가 넘어지셨는데 허리를 크게 다치셨다는 겁니다. 급한 대로 누나가 시골로 내려가 어머니를 병원에 모셨는데 아무래도 한동안 움직이기 어려우실 것 같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당장 가게 문을 열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이가 우선이라는 생각에 저는 가게에 있는 재료들을 가져와 그걸로 끼니를 때우고 남은 통장 잔고로는 아이를 키우는 데 쓰면서 버텨보기로 했습니다.
물론 장인어른과 장모님 하다못해 처형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는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고생이 되더라도 아이는 제가 직접 돌보고 싶었습니다. 아내라면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그렇게 했을 테니까요. 그렇게 6개월을 아이만 돌봤습니다.
그러면서 가게세는 나가고 수입은 없으니 통장은 텅텅 비었죠. 하는 수 없이 가게의 주방 쪽으로 평상을 놓고 나무판으로 벽을 세워 작은 방을 만들었습니다.
옷가지라고 해봤자 아이것이 대부분이라 그만해도 지낼 만했습니다. 그리고 살던 집을 빼서 정리를 했습니다. 전세 기간이 끝나 이사를 하기도 해야 했는데 짐이 너무 없어 슬프더라고요.
옷가지를 정리했는데 가방 하나에 다 들어갔으니까요. 가방은 제가 베개 대신으로 썼습니다. 아내의 냄새에 겨우 잠이 들 수 있겠더라고요. 장롱도 없이 간이 옷장을 썼고 그릇들도 집에는 많지 않아 정말 아이 짐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아이는 가게에 딸린 쪽방에서 자랐습니다. 처음에 다시 장사를 시작하면서는 손님이 모이지 않았지만 아이를 생각하면 손님이 없기를 바란 적도 있었습니다.
바보 같죠.. 그렇게 아이 돌이 지나고 세 살이 되고, 네 살이 지날 때야 겨우 작은 월셋방을 구해 이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아이는 계속 저와 가게 있었죠.
아이는 그런데도 구김살 없이 잘 자라주었습니다.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메뉴판을 읽더니, 떠듬떠듬 책도 보더라고요. 공부하는 담을 쌓았던 저인지라 아내를 닮아 우리 딸이 똑똑하다는 생각에 아이를 잘 키우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형편은 쉽게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저에게 한 줄기 빛 같은 손길이 있었습니다. 누구인지는 모르나 누군가 매달 한 포대씩 쌀을 배달시켜 주는 겁니다.
아이 돌이 지나고 나서부터였으니까. 꽤나 오래 누군지 밝히지도 않고 계속 보내주었습니다. 쌀집에 가서 물어보기도 했지만, 말하지 말라는 당부가 있었다면서 묻지 말라고만 하더라구요.
궁금했지만, 저에게는 큰 도움이었던지라 더 이상 찾지 않고 먼저 나타나 주길 기다렸습니다. 막연히 아내와 저를 아시는 봉사단체에서 보내주시겠거니 싶어 찾지 않은 것도 있었습니다.
그저 쌀로 아이에게 밥이나 잘 먹이자 싶었습니다. 아이는 제 바람대로 씩씩하고 총명하게 잘 자랐습니다. 특별히 뭘 가르치거나 해준 게 없는데도 어찌나 총명한지 동네에서 소문이 날 정도였습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에는 한자도 술술 외우고 글쓰기 대회에 나가서도 상도 꼬박꼬박 받아왔습니다. 미술대회에서도 상을 타고요. 체육시간에도 지기 싫어 열심히 잘한다며 담임 선생님께서
” 유리가 나중에 뭐가 돼도 되겠어요. 아버님”
라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해 주셨습니다. 아이는 정말 나무랄 데 없이 착하고 예쁘게 잘 자라 주었습니다. 엄마가 있었다면 더 잘 키웠을 아이라는 생각에 저는 항상 아이에게 미안했습니다.
제가 고생만 시키지 않았다면 아내는 그렇게 죽지 않았을 것 같았거든요. 아이가 중학생이 되고서야 저는 아이 학원을 겨우 보내줄 수 있었습니다. 아이가 영어가 좀 부족한 것 같다며 학원에 다녀보고 싶다고 했거든요. 그제야 부모 노릇을 좀 하는 것 같아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러는 와중에도 쌀은 매달 한 포대씩 도착을 했습니다. 이제는 도움 없이도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봉사단체 회장님께 연락을 드렸습니다.
“아니? 난 모르는데, 우리는 그런 것까지 생각을 못 했네… 글쎄 누굴까?”
라며 아니라고 하시는 겁니다. 우리에게 이렇게 보낼 사람이 없는데 궁금해졌습니다. 쌀집에 가서 이제는 쌀 안 보내줘도 되니까. 배달하지 말라고 말했더니,
” 그게…. 우리도 곤란한 게 사람이 계좌로 돈을 보내요. 무통장 입금으로 아저씨네 가게 이름만 적어서 우리는 쌀을 보낼 수밖에 없어요. 러지 말고 잘 생각해봐요. 이렇게 오래 쌀을 보낼 것 같으면 아마 사정을 다 아는 사람 같은데?”
라고 하더라고요.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에게 말도 없이 오래 쌀을 보낼 사람은 없었습니다. 언젠간 쌀 보내는 사람이 나타날까 싶어 언제부터 받았는지 적어놓고 나중에 갚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은 또 흘렀습니다.
분식점은 약간 넓혀 가까운 거리로 옮겨갔습니다. 집도 방 두 칸짜리 전세로 이사를 했죠. 딸아이는 고등학생이 되었습니다. 아이는 고등학생이 돼서도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자라는 아이들만 모아놓은 반에 들어가 거기서도 자라는 축이 욕심을 내서 잠도 줄여가며 공부했습니다. 혹여나 체력이 떨어질까 걱정돼서 보약도 먹이고 끼니마다 좋다는 걸로만 먹였습니다.
” 아빠 이걸 나만 먹어? 아빠도 먹어. 아빠가 건강해야 내 뒷바라지도 하지~ 아빠 쓰러지면 나는 어떻게 해?”
라며 웃는 얼굴이 꼭 엄마를 닮은 아이를 저는 끝까지 잘 키워 대학도 보내고 취직도 시키고 시집도 보내야 했습니다. 그래야 나중에 아내를 만나게 돼도 부끄럽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야 제 잘못을 아내가 이해해 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아이가 자랄수록 저는 더 많은 행복과 보람과 사랑을 받았고 좋았습니다. 그럴수록 아내에게 더 미안했죠. 그래서 매일 일기를 썼습니다.
나중에 제 생일 끝나면 일기와 함께 같이 화장해달라고 하려고요. 그렇게 가져가서 아내에게 나 역시 마음이 편치 않았다는 걸 알려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끝내 마음에 걸리는 건 쌀이었습니다.
가게를 이전했는데도 꼬박꼬박 날짜도 어기지 않고 도착했거든요. 누군지 알아야 보답을 하던 감사 인사를 하던 할 텐데 도대체 누군지 떠오르지가 않았습니다.
감사히 먹을 때는 잘 몰랐는데 여유가 생기고 나니 더 궁금해지더군요. 갚을 능력이 되는데 갚을 길이 없다. 보니 더 조바심이 나더라고요. 그럼에도 섣불리 행동할 수 없어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딸아이가
” 아빠가 모르게 누구 돕고 잊어버린 거 아니야? 사람은 그게 고마워서 보낼 수도 있잖아요. 기다려봐요. 나타날 거야”
라고 말하는데 말도 일리가 있더라구요. 그래서 좀 더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감사한 쌀로 우리 딸에게 맛있는 밥을 지으면서요. 우리 딸은 그분이 보내주신 쌀로 지은 밥으로 키운 애이다. 보니 아이가 건강하고 똑똑한 것도 다 덕분인 것 같아 더 감사하다는 마음을 갖기로 딸아이와 약속했거든요.
아이도 자신이 나중에 돈을 벌면 누군가 돕는 일부터 하겠다고 말했죠. 저희 부녀는 그분의 감사함을 항상 마음속에 품고 있었습니다. 딸아이의 고등학교 시절은 정말 정신없이 흘렀습니다.
입시 공부를 하는 기간이다. 보니 항상 급박했죠. 그래서인지 시간은 순식간에 흐른 것처럼 흘렀습니다. 그리고 아이는 마침내 본인이 원하는 대학에 원하는 과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다니던 고등학교에서 붙인 현수막에 적힌 딸아이의 이름이 자랑스러워 사진으로 찍었습니다. 그리고 사진으로 뽑아서는 제 일기에 붙였습니다. 나중에 아내에게 보여주려고요.
아내는 알아보지도 못한 예쁘고 착한 우리 딸이 이렇게 훌륭한 대학생이 된 순간을 빠짐없이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저는 그저 아내 대신 아이를 돌보는 사람이라는 심정으로 모든 걸 기록하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딸은 그런 저에게
” 아빠! 엄마도 하늘나라에서 다 봐~ 뭘 그렇게 해~”
라면서도 사진 속에 제 엄마의 얼굴을 눈에 담고 또 닮는 걸 봤습니다. 엄마가 없어 외롭고 서러운 날들이 분명 있었을 텐데도 저에게 한 번도 표현하지 않고 잘 자라 명문대생이 된 딸이 자랑스럽습니다. 고맙기도 하구요.
그렇게 아이가 대학에 진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쌀이 오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누군지 알지도 못했는데 쌀이 오지 않으니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쌀 가게에 가서 물으니
“안 그래도 여기 이거 봐. 한 번도 이름이 찍힌 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이기석이라고 적혀 있지? 아는 이름이야? 이걸 끝으로 돈이 안 들어와”
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아무리 되뇌어 봐도 저는 모르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래서 봉사단체 회장님께 여쭈어보니
“이기석? 어디서 들어봤는데… 기석인가 보다! 맞아! 철순 씨 봉사 못 나올 때 미순 씨가 유난히 챙기던 고등학생 남자애가 기석이었어! 보육원 수녀님께 여쭤보면 되겠네~”
라고 하시더라구요. 드디어 쌀을 보내준 고마운 사람을 찾았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보육원으로가 원장 수녀님께 여쭈어보며 근황을 아시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굉장히 슬픈 표정으로
“안드로는 얼마 전에 하나님의 곁으로 갔습니다”
라고 이야기하시더군요. 머리가 쭈뼛 서고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느낌이었습니다.
” 혹시 가족분들을 만나볼 수 있을까요? 꼭 만나야 합니다”
라며 겨우 정신을 붙들고 물었습니다. 사람이 없다면 가족에게라도 감사 인사를 해야 했습니다.
“여기서 같이 자란 율리아나와 결혼을 했어요. 그리고 아들을 낳고 살다가 그만 율리아나에게 연락해 보고 제가 다시 연락드릴게요”
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다음날 가족들이 만나보고 싶다고 하셨다는 연락을 받고 다음 쉬는 날 딸아이와 함께 집으로 향했습니다. 과일 바구니와 그간 받은 쌀값에는 훨씬 못 미치지만 얼마의 돈을 채 조의금이라도 하고 싶었거든요.
주소에 적힌 곳으로 갔더니 초등학교 5~6학년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 하나가 나와 있었어요.
“엄마! 손님 오셨어요. “
하고 소리를 치더니,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문 안으로 들어서는데 반지하에 주방과 방 하나가 딸린 집에 살고 계시더라고요. 한 여자분이 오셨어요.
” 감사 분식에서 오신 거죠? “
라고 말을 하는데 20년 전 저를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해 슬픔이 가득한 얼굴이었거든요. 절망에 가까운 슬픔 속에서 겨우 버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에 저는 집 안으로 발을 들여놓기가 조심스러웠습니다.
딸아이는 그런 제 마음을 읽은 건지 제 어깨를 감싸며 안으로 천천히 인도해 주었습니다. 여자분의 안내대로 방에 마주 보고 앉아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당황하고 있는데,
” 우리 아이 아빠가 미순이 이모가 그렇게 되셨다는 소식을 뒤늦게 알고 나서 너무 괴로워했어요. 그래서 돈을 벌자마자 제일 먼저 한 게 아저씨네 쌀을 보낸 거예요. 하늘이 두 쪽이라도 그건 해야 한다면서 그렇게 꼬박꼬박 쌀값을 보내더라고요. 우리 애 운동화 살 건 밀어도 그건 안 미뤘어요. “
라며 허탈하게 웃으며 말을 시작하더라고요.
” 근데 그건 할 수밖에 없었어요. 미순이 이모한테는 그래야 했거든요. 기석이가 고등학교 때 유난히 왕따를 심하게 당했어요. 애가 여리고 순한데 부모가 없으니 학교에서 애들이 엄청 괴롭혔거든요. 그런데 그걸 미순이 이모가 알아보고 기석이 잘못될까 봐 엄청 챙겼어요.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학교로 쫓아도 가시고 걔들 부모 만나서 따져주고 기석이는 아마 미순 이모 아니었으면 더 일찍 나쁜 생각 먹고 해서 안 되는 선택을 했을 거예요.” 라며 눈물을 닦더군요.
” 미순이 이모가 적극적으로 나서줘서 학교 일이 어느 정도 해결이 되고, 기석이는 그때야 좀 정상적으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래서 미순이 이모 오시는 날마다 아기 태어나면 보여달라며 그렇게 좋아했었는데 이모 그렇게 되시고 정말 괴로워했어요.
자기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면서 며칠을 울었거든요. 그러다 저희 독립하는 시기 돼서 졸업도 하기 전에 나가더니, 공사장으로 일 다닌다고 하더라구요. 그러더니, 미순이 이모 딸한테 쌀 보냈다면서 엄청 좋아하더라고요. 기석이는 다른 취미도 없이 돈 벌어서 매달 쌀 보내는 재미에 살았어요. 물론 보시다시피 저희 형편도 안 좋지만 그것까지 못하게 할 수가 없더라구요.”
라고 말하는 여자분은 한동안 눈물을 흘렸습니다. 저와 딸아이도 함께 눈물을 흘리며 조용히 기다렸습니다.
” 그러다가 한 4개월 전쯤에 공사장에서 떨어져서 다리를 다쳤어요. 상처가 꽤 깊어 소장님이 돈 주면서 치료받으라고 할 정도로요.그런데도 쉬질 않고 일을 가더라고요.”
라고 하더니, 숨이 가빠진 여자분은 다시 천천히 숨을 고르고 말을 했습니다.
” 저는 걱정되니까. 일 가지 말고 좀 쉬라고 했더니, 웃으면서 저한테 돈을 주고 쌀값 좀 보내달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당연히 기석이 이름으로 보내는 줄 알고 그렇게 했어요. 그러더니, 그날 저녁에 와서 너무 피곤하다고 너무 졸리다 하면서 돌아누웠는데 길로 못 일어났어요.
응급실에서는 상처가 깊어서 패혈증이 왔다고 왜 이 상태가 될 때까지 병원에 안 왔냐고 하더라구요. 바보 같은 게 은혜 갚을 줄만 알고 제 몸은 보살필 줄 몰랐던 거예요. 저랑 애는 어떻게 하라고…”
라며 우는데 저와 딸아이도 소리를 내며 울어버렸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먹은 감사한 쌀이 이 가정에는 어느 금덩이 못지않은 가치를 지닌 것을 알았기에 감사함이 몇 배로 더 크게 느껴져 어떻게 해야 할지 이제라도 알았으니 감사함을 돌려드릴 차례였습니다.
” 저기 이런 말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제가 아이 크는 동안 돈을 좀 보낼게요 저희도 형편이 나아졌지만 다 책임질 만큼은 아니라 한 달에 60만 원씩은 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
라고 말을 했습니다. 제 말을 들은 여자분은 눈이 커다랗게 되었다가 다시 눈물을 흘리며
” 너무 감사하지만… 제가 어떡해…” 라고 하기에
” 보내주신 쌀 덕에 우리 딸이 이렇게 잘 자랐고 명문대도 갔어요. 다 기석 씨의 정성 덕분이죠. 이제는 제가 갚을게요 저는 형편이 더 나을 때 갚는 거니 부담 갖지 마세요. 더 도움이 못 되어 죄송합니다”
라고 말하는데 딸 아이가 제 손을 꼭 잡더니, 웃었습니다. 아이가 웃는 얼굴을 보자니 아내가 칭찬해주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과일 바구니와 가져간 돈을 들이고 돌아서 나오는 발걸음이 가벼웠습니다.
그날 따라 아내가 너무 보고 싶어 눈물이 나더라구요. 그리고 다음날부터 기석 씨네 집으로 매달 돈을 보냈습니다. 약속대로 60만원씩 보낼 때도 있고 여유가 되면 더 보낼 때도 있었죠.
기석 씨처럼 저도 취미 삼아 일을 했습니다. 딸아이 등록금은 장학금을 타더라고요. 기석 씨 아내분도 열심히 사시더라고요. 그러더니, 아들도 저희 아이와 같은 대학에 얼마 전 입학을 하고 다니는 중입니다. 어찌나 기특한지 모릅니다. 취직하면 저희에게 은혜를 갚겠다고 하는 걸 저희처럼 힘든 사람에게 갚아달라고 했습니다.
가끔 떡볶이나 먹으러 와서 얼굴이나 보자고 했고요. 이 정도면 아내를 다시 만날 때 수고했다는 말 들을 수 있을까요? 꿈에라도 나와 웃는 얼굴 좀 보여줬으면 좋겠습니다.
글을 쓰면서도 아내가 보고 싶어 눈물만 나네요. 아내가 무척 그리운 밤입니다. 여러분들은 소중한 사람이 곁에 있을 때 마음을 충분히 나누시길 바랍니다. 나중에 해야지 하고 미루다 저처럼 후회하실 수도 있으니까요. 저는 후회를 앞으로도 또 베푸는 데 쓸 계획입니다. 아내한테 칭찬받고 싶어서요 사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두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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