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60대 평범한 중년 여성입니다. 남편이 사고로 세상 먼저 떠나고 아들 하나 바라보면서 살아왔습니다.
다행히 아들은 잘 자라 주었고 공부도 아주 잘했습니다. 매년 학교에서 가지고 오는 상장만 해도 벽에다 붙이기 어려워 따로 책자를 만들어야 할 정도였어요.
학교와 동네의 자랑이었던 아들은 저에게 있어서도 이 세상에서 가장 자랑스럽고 빛이 나는 보물이었죠.
사춘기에도 반항 한 번을 안 하던 그런 아들이었습니다.
학교 다니는 내내 우수한 성적을 받아던 아들은 명문 대학에 진학하였고 법대를 가게 되었습니다.
대학시절에도 공부만 하던 아들이 언제부터인가 조금씩 변해가는 모습을 보였어요.
여자친구를 사귀게 되면서 말입니다. 이렇게 여자를 사귀면서 변해가는 아들은 엄마에게 생전 처음으로 반항을 하기 시작을 했어요.
그런데 아들은 이제 와서 소방관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거예요.
저는 아들이 말에 충격을 받았고 하필 위험한 소방관이 되고 싶다고 하는지 답답하고 미칠 지경이었죠.
언제부터 인가 소방관이 되는 생각을 했고 어머님이 반대하실 것 같아서 포기했다가 다시 소방관이 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아들은 고집을 부렸습니다.
“어머님 판, 검사보다는 위험한 직업이지만,
소방관 일하시면서 무사히 은퇴하시는 분들도 많다고요.
저 평생 어머니 뜻대로 살아오다
처음으로 스스로 해보고 싶은 일이에요.
그러니 이번에는 어머님이 양보해 주세요.”
결국 아들은 대학 졸업 후 소방관 시험에 합격을 하게 되었고 사귀던 여자친구와 결혼을 하게 되었어요.
저는 솔직히 아들이 소방관을 선택한 것도 언제부터 인가 아들과 말다툼을 자주 하게 된 것도 전부 며느리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며느리를 미워했습니다.
하지만 아들을 위해서라도 좋은 마음으로 이해하고 감정 정리를 했고 며느리에게 따뜻하게 대해주려 노력했습니다.
며느리는 보육원에서 자랐다고 했습니다. 생각해 보니 마음이 짠했습니다.
우리 아들도 아버지 없이 키워서 보육원에서 자란 마음이 오죽할까 생각하며 딸처럼 잘해 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평화롭고 조용하던 우리 집에 또다시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습니다. 소중한 내 아들 형우가 폐암에 걸리게 된 것이었어요.
젊고 건강한 아들이 다른 병도 아니고 폐암에 걸렸다고 합니다.
저는 이유가 당연히 직업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의 탓이 아니었던 그 일에 대해 누군가에게 꼭 원인을 돌리고 싶었습니다.
아들을 탓할 수 없었으니 며느리에게 돌리게 되었습니다. 그때 당시 저도 그게 잘못된 생각이란 걸 알았지만 그렇게 해야지 버틸 수 있었던 것 같았어요.
그래서 아무 죄 없는 며느리를 탓을 했습니다. 저는 모진 말로 며느리에게 상처를 주었어요.
하지만 며느리는 저를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위로를 건네주며 같이 이 위기를 극복하자고 했습니다.
이렇게 며느리는 힘들어하는 저를 챙겨주며 아들을 어떻게든 살려내 보려고 애를 썼어요.
하지만 오랜 투병 끝에 아들은 결국 세상을 먼저 떠나게 되었습니다.
아들에게 더 잘해주지 못한 것만 생각이 났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먼저 보낸 저는 세상 사는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모든 것들이 후회가 되었고 잘못한 일만 생각이 났습니다. 며느리에게도 미안하고 안쓰러웠습니다.
내가 조금만 더 어른스러웠다면 조금만 더 아이들의 행복만 바라고 말과 행동을 했더라면 아들이 몹쓸 병에 걸리지 않거나 편히 눈을 감았을 거라고 후회를 하게 되었어요.
아들을 잃은 슬픔과 죄책감으로 깊은 수렁에 빠져있을 때, 저를 위로해 주고 다시 살아갈 용기를 주는 존재는 며느리였습니다.
이런 며느리가 고마웠지만 이제 아들도 없고 며느리도 더 이상 고생시키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렇게 저는 모든 전 재산을 물려주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그동안 못난 시어머니 밑에서 고생했다.
곱게 늙어야 했는데 못난 모습만
보여줘서 미안하구나
이제 나는 시골로 내려가서
텃밭이나 가꾸면서 살란다.
너는 니 갈 길 가라 어린 네가
나한테 발목 잡혀서 되겠니.
워낙 못난 시어머니라서 내가 해줄 건 없고,
내가 가진 재산 너에게 다 물려주고
난 시골에 가서 살란다.”
며느리는 고집을 부리며 같이 시골로 간다고 했지만 저는 그런 며느리를 결국 혼자 두고 시골로 내려왔습니다.
그렇게 혼자 산 지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누군가 대문을 부서져라 두드리며 저를 부르더군요.
목소리를 듣자마자 알 수 있었죠 며느리였습니다. 사실 그동안 며느리가 몇 번을 찾아와도 집에 사람 없는 척하고 돌려보냈습니다.
이유는 이제 모든 걸 잊고 좋은 사람을 만나 완전히 새 출발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이날도 저는 문을 열어주지 않았고 며느리도 쉽게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대문을 두드리면 저를 불렀어요.
저는 슬슬 며느리가 걱정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밖에서 있을 줄을 몰랐으니까요.
결국 제가 밖으로 나가, 돌려보내려 하려는 순간 며느리가 곧바로 제 손을 부여잡았습니다.
어머니 지금 당장 갈 곳이 있어요. 다급한 목소리로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았습니다.
“다른 말씀 물어보지 마시고 저랑 우선 가요 어머님.”
저는 주저리주저리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났고..
“그런 말씀은 나중에 하세요.
우선 빨리 가봐야 할 곳이 있으니까요.
무슨 일인지는 제가 도착해서
직접 보시게 되면 말씀드릴게요.”
어디를 가는지 예상이 되질 않았어요. 차를 타고 한참을 갔고 고속도로를 지나서 가는 것만 확인을 하고 저는 무슨 일인가 싶어 물어봐도 대답도 안 해주더라고요.
며느리는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무언가 긴장한 것 같은 모습으로 운전을 하고 있었어요.
그렇게 한참을 달려오다 보니 점점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하루에도 몇 번씩 왔다 갔다 하던 그 길이었어요.
아들이 치료를 받았던 병원으로 가는 길이었어요. 저는 아들 생각이 나서 마음이 안 좋았습니다.
혹시 며느리가 아픈 건가 싶어? 심장이 두근두근했습니다. 결국 예상했던 아들이 투병했던 병원에 도착을 했어요.
“너 이 병원에 왜 온 거니?
설마 너까지 아픈 거야
정말 그런 거야?”
며느리는 작은 목소리로..
” 어머 , 어머니 죄송해요…
거기까지는 제가 생각을 못 했어요.
그런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왜 어머니를 모시고 여기 왔는지
곧 아시게 될 거예요.
그러니 불안해하지 마시고
조금만 더 참아 주세요”
그렇게 며느리를 따라 병원 안으로 들어갔고 병실이 있는 층으로 올라갔죠. 며느리는 제 손을 꽉 잡고 한 병실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문을 열어주며 저보고 먼저 들어가 보라고 하더군요. 도대체 누구 병실이길래… 그런데 그곳에 세상을 떠난 아들이 있었습니다. 분명 그럴 리가 없었지만 제 아들이 저를 보고 있었어요.
분명 병실에서 숨을 거두는 아들 곁에 있었고 염을 할 때 차가운 아들 만져가며 눈물을 쏟았기 때문에 분명 내 아들은 죽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내 눈앞에 아들이 보이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아들을 끌어안고 울다 정신을 차려 아들이 맞는지 확인하게 되었어요. 며느리는 차근차근 말하기 시작했어요.
“네 어머님 그분 형우 씨 아니에요.
그런데 그분이 어머님께서 출산하셨을 때
죽은 줄 알았던 남편 쌍둥이 동생일지도 몰라요.
저와 이분이 알아본 사실로는 그럴 확률이 높아요.
그래서 유전자 검사를 해야 할 것 같아요.”
사실 아들은 쌍둥이였고 병원에 불이 나서… 간신히 쌍둥이 둘 중에 한 아이만 데리고 나오느라 다른 아이는 죽었다고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며느리는 혼자 남은 외로움이 너무 컸고 자원봉사를 하면서 살고 있었고 그곳에서 남편과 너무 닮은 그 남자를 만났다고 했습니다.
유전자 검사 결과, 아들이 맞았습니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구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나를 위해 애를 쓰고 있는 착한 며느리에게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뿐입니다. 결국은 며느리의 고집에 며느리가 아닌 딸로 같이 살고 있습니다.
뒤늦게 찾은 아들 역시 주기적으로 만남을 가지며 못다 한 엄마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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