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앤드류 어서 일어나 집이 이렇게 더러운데 잠이 오니? 너 오늘 할 일 많으니까, 꾸물대지 말고 빠릿빠릿하게 움직여! “
저의 첫 번째 양부모는 저를 자식이 아닌 일꾼으로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어린 나이였고 그때가 제대로 기억도 다 나질 않는 정도였지만 분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당시에 제가 집안 곳곳을 청소하고 양부모님에게 검사받았다는 점이었죠.
저는 한국에서 미국으로 불법 해외 입양된 처지입니다. 기왕이면 이렇게 먼 나라로 입양되었으면 좋은 가정에서 좋은 부모를 만나서 행복하게 살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하지만 불행하게도 저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이곳으로 입양되었을 당시는 1970년대였습니다. 제가 알기로 당시에 한국의 경제는 그리 좋지 못한 편이었고 많은 한국의 부모들이 다른 나라로 아이들을 입양을 보냈다고 들었습니다.
물론 어릴 때는 그런 것도 전혀 몰랐지만요 사실 제가 첫 번째 양부모님이 저의 친부모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시간이 한참이 지난 후였습니다. 아마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친부모에 대한 호기심과 복수심이 불타올랐던 것을요.
” 그러니까, 내가 다른 아이를 입양하자고 했잖아요. 하여튼 똥고집 때문에 일도 제대로 못하는 저런 애를 데려오고 못살아~”
당시 어린 나이였지만 저에게는 다소 충격적인 대화였습니다. 첫 번째 양부모님의 대화 내용에서는 당시의 어린 저도 제가 그들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죠.
그리고 한 가지 더 알아낸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건 양부모님들이 저를 자식으로서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죠. 대체 나를 사랑하지도 않을 거면서 왜 데려와서 키우는 거지 내 친부모님은 누구야 어린 나이였지만 그런 생각들을 했었습니다. 아주 자연스러운 본능적인 생각이었죠.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이 있으며 더구나 부모의 도움이 필요한 유년기 시절에는 그러한 욕구들이 더더욱 강한 시기이니까요.
그렇기에 더더욱 슬펐고 우울했으며 분노했습니다. 저를 사랑해 주지 않는 양부모님에 대한 원망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큰 원망은 친부모님에 대한 분노였습니다.
애초에 나를 버리지 않았다면 이런 일들도 없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죠. 저는 그냥 남들처럼 부모님의 따뜻한 눈길과 손길 그리고 사랑을 받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양부모님에게 사랑받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죠. 시키는 것은 싫은 소리 한마디 하지 않고 무조건 다 해냈습니다.
겨울에는 손이 벌겋게 부어올라서 동상에 걸릴 정도 집안일을 했고 걸레질도 했으며 여름에는 땀으로 온몸을 적실 정도로 했죠. 그럴 때면 양부모님은 그나마 한 번씩 칭찬해 주셨습니다.
” 요즘은 그래도 밥값은 하네 ‘”
당시에 저는 한마디에 정말이지 행복했습니다. 순진하거나 아니면 멍청했던 거죠.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말들이 부모의 입에서 나올 만한 말들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리고 저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첫 번째 양부모의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따지고 보면 제가 떠난 것이 아니라 양부모가 떠난 것이었죠.
다시 한번 버림받은 것이었습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양부모가 저를 입양했던 이유는 오직 한 가지 이유였습니다.
정부에서 나오는 지원금을 받아먹기 위해서였죠. 무슨 이유에서인지 어느 순간 정부 지원금이 끊어졌고 이후로 양부모는 저를 남겨두고 이사를 가버렸습니다.
찾을 수도 없었고 찾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오래전부터 양부모가 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애초에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죠.
‘ 나란놈은 어디를 가나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구나… 내 친부모도 그렇고…’
그때 제 나이 8살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버림받은 저는 여러 위탁 과정을 돌아다니며 또다시 힘든 생활을 연명해 나갔습니다. 최소한 밥은 굶지 않아서 잠잘 곳은 있어서 그때는 너무나 행복했죠.
하지만 위탁 가정 어디에도 저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어느 정도 머물면 또 다른 집으로 가야 했죠. 이런 생활들이 이어지다 보니 저도 사람인지라 점점 자신에게 의문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다른 사람들의 탓이 아닌 자신의 탓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죠.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아이가 태어나서 이렇게 지속해서 버림받는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다가 저에게 다시 한번 기회가 왔습니다. 두 번째 입양을 하게 되었거든요. 이번 양부모님은 첫 번째 양부모와는 달리 조금 더 젊은 부부였습니다.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저분들의 마음에 들어서 사랑받는 아이가 되어 보자 어쩌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 처음에는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가는 듯 보였습니다.
두 번째 양부모님은 무슨 사업을 하는지 집도 으리으리하게 큰 집에서 살고 있었고, 저를 위해서도 돈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아직 진심으로 저를 사랑해 준다는 느낌은 없었지만 억지로라도 저에게 잘해주려는 모습이 보였기에 또한 최선을 다했죠. 이대로만 잘 버틴다면 최소한 제가 성인이 될 때까지는 이분들에게 보살핌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말이죠. 연애 때와 마찬가지로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와 훤한 대낮인데도 집에는 무언가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죠.
그리고 티비에서만 보던 익숙한 복장을 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경찰이었어요. 그 경찰들은 두 번째 양부모님에게 수갑을 채우고 데려갔죠. 죄명은 사기였습니다.
저를 입양한 이유도 평범한 부부로 위장하기 위함이었던 것이었죠. 이번에야말로 사랑받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역시나 이용만 당하고 버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졸지에 저는 그때부터 노숙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때가 제 나이 열여섯 살이었죠. 한국으로 따지면 중학생쯤 될까요?
이때부터는 오롯이 저의 힘으로 치열하고 잔인한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했습니다. 돈을 벌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했죠.
하지만 정상적인 방법으로 제 나이에 일을 할 수 있는 곳은 거의 없었습니다. 밥을 먹으려면 돈을 벌어야 했고 일을 하지 못하니 굶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노숙 생활 초반에는 남의 집 개밥까지 훔쳐먹은 적도 있었습니다. 지금이야 때려죽여도 못 먹겠지만, 그때는 진짜 그거라도 먹지 못하면 죽는다고 생각했었으니까요.
그러다가 겨우겨우 숙식을 제공해 주는 일자리를 찾은 것이 건설 노동 일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잡다한 일부터 시작해서 제가 꾸준하게 몇 년을 도망가지 않고 일을 해내니 조금씩 기술적인 일도 맡겨주더군요.
그렇게 저는 성인이 될 때까지 처음 배운 건설 일을 기술직으로 발전시켜 제 밥벌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아직 근육도 여물지 않은 나이에 그토록 힘든 일들을 버텨내었던 것은 분노와 복수심 덕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친부모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 말이에요. 제가 그들에게 복수하는 길은 오로지 제가 이 자본주의 경쟁사회에서 보란 듯이 성공하는 것이라고 생각 그리고 찾아가는 거죠.
당신들이 버린 아이가 이렇게 잘 살고 있다. 이렇게 성공했다. 대체 버릴 자식을 왜 낳은 것이냐 당당하게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그 목표 하나로 버티고 버텨서 조금만 더 돈을 모으면 제 가게를 하나 차릴 정도가 되어가고 있었죠. 하지만 제 인생이 그렇게 쉽게 풀릴리 만무했습니다.
언제나 불안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 법이죠. 저는 한순간에 미국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저에게 미국 시민권이 없다는 이유였죠.
그 많고 많은 위탁 과정을 떠돌며 그리고 두 번의 입양을 했음에도 어떤 누구도 저에게 시민권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사람은 없었습니다.
누굴 탓하겠나요? 모두 제 탓이었죠. 그렇게 저는 20대 후반의 나이에 무국적자로 미국에서 추방당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일이 저에게 꼭 나쁜 영향을 주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후로 멕시코의 새로운 기반을 다지기 시작했고, 그곳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나고 이쁜 자식들까지 낳았으니까요. 물론 새로운 나라에서 새로운 시작을 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워낙 독하게 살아왔던지라 그곳에서도 죽기 살기로 하면 못할 게 뭐가 있느냐 하는 마음으로 주어진 일들을 해결해 나가다 보니 그곳에서 완전히 인정받는 건설 기술자로 소문이 나버렸습니다.
아무래도 미국이라는 선진국에서 그러한 기술들을 배웠기에 멕시코인들은 더욱 저에 대한 신뢰를 하는 듯했죠. 하지만 그때마다 저는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 이건 미국에서 배운 기술이 뛰어나서가 아니야. 내가 죽기 살기로 열심히 해서 그런 거야. 한국 사람들 내가 잘 모르지만, 근성 있어 무슨 얘기인지 알지? “
나를 버린 조국이 뭐가 그리 좋다고… 한국이라는 나라가 사실 저에게 좋은 기억이 있는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태어난 곳이었지만 미국에 입양된 이후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기도 했고 잘 알지도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뭐랄까 자긍심 자부심 같은 것이 늘 느껴졌습니다. 아무래도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그랬던 것 같아요.
힘든 전쟁의 시기를 견디고 경제적인 위기가 왔지만 굳건하게 어떤 나라보다 빠르게 극복한 나라라고 말이죠. 한편으로는 내가 그런 나라의 민족이기에 이렇게 지독하게 성공을 위해 달려 나갈 수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내와 결혼한지 4년쯤 되었을 때였습니다. 아들이 하나 있고 막내딸도 하나 있죠. 이제는 때가 왔다고 생각했어요.
친부모를 찾아서 그들에게 내가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죠. 사실 오래전부터 이날을 위해 미리 준비해 왔습니다.
DNA 등록을 해놓았죠 이후로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잊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기관을 통해 친부모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었죠.
그렇게 저는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처음으로 한국이라는 나라에 입국했습니다. 친부모를 만나기 위함이었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한참을 고민하고 외웠습니다.
이제는 누가 제 어깨를 툭 치기만 하더라도 술술 나올 정도로 그들에게 물어볼 질문들을 외우고 있었죠. 준비는 완벽했습니다.
하지만 떨리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기관의 직원과 동행하기 위해 도움을 줄 직원분을 만났죠. 그런데 무슨 일인지 그들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어요.
마치 저에게 죄를 지은 듯한 모습이기도 하면서 머뭇거리는 모습이 보였죠. 하지만 어떤 다른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묵묵히 저희를 안내했고 제 친부모가 있다는 집 앞에까지 당도했습니다.
그리고 5분 뒤 저는 그곳에서 아내와 아이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서럽게 오열하고 말았습니다.
” 정균씨 유감입니다. 저희도 당시에는 알지 못했으나, 정균 씨가 직접 한국으로 오신다고 해서 수소문을 한 끝에 알게 되었습니다. 이미 두 분은 세상을 떠나신 지 오래되었습니다.
70년대 당시 정균 씨의 부모님은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에 가난을 극복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이러다가 아이까지 굶겨 죽이겠다는 생각에 입양을 보냈다고 해요.
미국은 잘 사는 나라니까 최소한 굶어 죽지는 않을 거라고 말이죠. 정균씨의 아버님은 건설업에 종사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근무 중 철근의 다리가 깔리면서 다리를 못쓰게 되었고 아버님 대신 어머님이 밖으로 일을 나가야 했다고 하지만 불행하게도 어머님이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음주 차량에 치여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불구가 된 아버님은 이후로 정균씨를 찾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셨던 모양입니다. 몸도 성치 하는데 친척들의 도움으로 미국까지 다녀오신 모양이에요. 혹시나 정균 씨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마음고생이 심하셨는지 아버님도 몇 년 전에 암으로 돌아가셨어요. “
그 모든 사실을 듣고 나자 처절한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이미 친부모님이 살던 집은 폐가 수준이 되었습니다. 거미줄이 쳐져 있었고, 미쳐 돌아가신 친부모님의 유품들도 정리되지 않은 채로 널브러져 있었죠. 그곳에는 빛바른 낡은 사진 한 장이 눈에 띄었습니다.
한 동양인 젊은 여성이 남자아이로 보이는 갓난아이를 품에 안고 어색하지만 세상 누구보다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죠. 사진의 뒷면에는 알 수 없는 한국어가 적혀있었습니다.
‘ 우리 가족 복덩이 정균이와 ‘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순간에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요? 얼마나 마음이 찢어졌을까요? 저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쯤 하늘에서 저를 보고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잘 살고 있다고 이제 제 걱정하지 마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후로 저는 아내와 아이들 모두 한국에 데려와 한국에서 새로운 터전을 잡았습니다. 부모님이 살던 집에서 말이죠. 그래야 할 것 같았습니다. 이곳이라면 우리 부모님들도 저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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