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노부부를 홀로 부양하는 20대 청년..” 군대 휴가받고 집에 갔더니 영양실조로 쓰러진 할머니, 막노동으로 병원비 내고 복귀했더니 대대장님의 ‘이 말’에 펑펑 오열하고 말았습니다

안녕하세요저는 40대 초반의 남성입니다. 살다 보면 절대 잊지 못할 소중한 인연을 만나게 되죠. 저에게도 그런 소중한 인연이 있습니다.

제 아버지는 흔히 말하는 망나니였습니다. 동네에서 유명했어요. 많지 않았던 집안의 재산을 모두 끌어다가 도박으로 탕진하고 돈을 잃으면 술만 마시는 탓에 알코올 중독까지 있었죠.

이런 아버지를 견디지 못했던 어머니는 제가 네 살이 됐을 때 결국 집을 나가셨습니다. 어머니는 집을 나가셨고 아버지는 한 번 집을 나가면 한동안 돌아오지 않으셨기 때문에 저를 기르는 건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몫이었어요.

그 외에는 저를 돌봐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친구는 있었어요. 초등학교를 다닐 때 만나서 중학교까지 같이 간 절친 친구는 준비물을 챙겨오지 못하는 저에게 자신의 준비물을 나눠주고 집으로 초대해서 함께 맛있는 걸 먹기도 했습니다.

미안해 나는 너한테 줄 만한 게 없네 부유한 친구와 달리 넉넉하지 않았던 형편이었던 저는 친구가 만족할 만큼의 무언가를 주지 못했습니다.

저에게 소중하고 귀중한 건 친구에게 흔한 것이었으니까요. 그렇게 중학교에 함께 올라갔고 중1 중2 같은 반에서 지내다 중학교 3학년 때 반이 나뉘게 되었습니다.

종례가 평소보다 늦게 끝나서 친구의 반으로 허겁지겁 달려가는데 기둥 코너를 돌려는 바로 그때 친구와 친구의 담임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민혁이를 잘 챙겨주는 게 참 기특해”

“아니에요. 선생님! 친구들끼리 이러는 건 당연하죠.”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애써 기분을 지우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친구와 함께 하교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주 우연히 친구가 같은 반 아이들과 대화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어요.

“야 너 김민혁이랑 다니는 거 안 힘드냐? 그 새끼 거지잖아ㅋㅋ”

저는 친구가 화를 낼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친구는 낄낄거리며 말에 이렇게 대답했어요.

“재밌잖아. 집에 굴러다니는 거 하나 줬을 뿐인데 고맙다고 굽신거리는 꼴이~ 그리고 걔랑 다니면 선생들이 좋아해ㅋㅋ 이번에 나 상장도 받잖아. 봉사상ㅋㅋ “

심장이 벌렁벌렁거렸습니다. 천사같은 얼굴로 저에게

민혁아… 할머니 건강은 좀 어떠셔? 우리 엄마한테 부탁해서 보양식이라도 끓여달라고 할까? 시험 기간에 우리 집에서 공부하자! 엄마가 너 데려오래!”

라고 말하던 제 친구는 이제 없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멀어졌습니다. 친구는 제가 피하는 걸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저에게 더 이상 묻지 않았어요.

친구에게 저는 딱 그 정도 존재였겠죠. 이런 일이 있고 난 이후로 저는 사람에게 정을 주지 않았습니다. 또 다시 배신당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친구를 만들지 않았을 뿐 아니라 어른들의 도움도 원치 않았습니다. 아버지라는 사람이 망나니였으니까요.

어른에 대한 기대가 없었습니다. 아버지와는 추억이랄 것도 없어요. 아버지 이야기를 간략하게 하자면 아버지는 효심도 부성애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왔다고 말은 하지만 당연히 거짓말이었어요. 할머니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왔다는 아버지의 말에 마음이 약해지는 분들이셨거든요.

그런 거 있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내 배 아파 낳은 자식인데 그래도 아들인데 하나뿐인 자식인데라는 생각 때문에 자식한테 큰소리 한 번 못 내는 분들이요.

제 조부모님이 딱 그런 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진작부터 알았어요. 보고 싶어서 왔다는 말이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걸요 아버지는 아들 왔다며 밥을 차리는 할머니 목소리라도 한번 듣고 싶어서 말을 거는 할아버지는 안중에도 없고 집 안 구석구석을 들춰보며 돈은 없는지 돈 되는 건 없는지를 찾아보고는 했거든요.

당당하게 할머니 지갑을 열어서 돈을 꺼내고는 주머니에 넣기도 했습니다. 밥이라도 먹고 가면 다행이죠. 인사도 없이 돈만 챙겨서 쌩하니 나가버리는 경우가 허다했어요. 하루는 그런 아버지를 보고 화가 나서 할머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 할머니는 화도 안 나?! 돈 주지 마!!”

” 내가 없이 키워서 그래 ..”

할머니는 소심한 목소리로 미안해서 모질게 굴 수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조금 크고 나서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벌어오시는 돈을 제가 모았어요.

절대 아버지가 찾을 수 없도록 집안 구석구석에 숨겨두었죠. 할머니가 돈을 두시는 곳은 한정적이고 늘 똑같았는데 어느 날부터 돈이 보이지 않으니 오랜만에 집에 온 아버지는 심하게 화를 냈습니다.

” 엄마! 여기 돈 어딨어?! “

할머니는 기죽은 목소리로 거기 없다고 말했습니다.

” 아빠! 돈 어딨냐고?! “

할아버지는 혈기왕성한 아버지에게 아무 말하지 못하고 고개만 가로저으셨습니다. 저에게 관심도 없던 아버지가 오랜만에 저를 부르셨습니다.

” 야! 너 어딨는지 알지? 빨리 말해 “

” 저는 몰라요. “

라는 말만 반복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돈을 숨기고 안 줄 리가 없으니 범인은 제가 확실했죠. 아버지는 저를 붙잡고 돈 내놓으라는 말만 하셨습니다.

저는 눈을 부릅뜨고 없다고 말했죠.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아버지는 저를 두들겨 팼어요. 주변에서 말려도 들을 생각을 안 했습니다. 집안 집기가 다 부서지는 소리와 고함소리가 나자 찾아온 옆집 어른들이 아버지를 겨우 말릴 수 있었습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아버지를 데려갔지만 가족 간의 일이고 아버지가 아들을 훈육했다는 식으로 훈방 조치되어 이 일은 일단락되었어요.

물론 아버지는 기어이 돈을 찾아가셨습니다. 온 집안을 뒤집어 엎었더라고요. 통장에 돈을 넣어놔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어쨌든 표면적으로 아버지는 연로하신 부모님과 미성년자 아들의 보호자였다.

가정 환경이 이렇다 보니 저는 꿈을 꿀 수가 없었습니다. 꿈이 뭔가요? 장래 희망마저도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이후로도 계속 찾아왔습니다. 예전에는 집에 오는 텀이 길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들더군요.

나중에 안 사실로는 아버지가 돈을 빌렸는데 돈을 갚지 못해서 쫓기는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도망도 갈 겸 밥도 먹을 겸 입에 풀칠할 돈도 가져갈 겸 집에 오는 거였죠. 할머니 할아버지는 그런 아버지를 걱정하셨습니다.

“그냥. 집에 있지 그러니?”

아버지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숟가락을 집어던지며 이렇게 화를 냈어요.

“여기 붙어있다가 잡혀갈 일 있어?! 그놈들이 여기를 모를 것 같아? “

잘못한 건 아버지인데 대체 왜 피해는 우리가 봐야 하는지… 왜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저렇게 행동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화가 났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약한 건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저에게는 좋은 분들이었어요. 정말 좋은 분들이었습니다. 온화하시고 다정한 분들이었죠.

어떻게 이런 분들 아래에서 저런 망나니가 태어났는지 전 아직도 이해를 할 수가 없어요. 아버지는 집에 올 때마다 말라가고 있었습니다.

매일같이 술만 마시고 사람들에게 쫓기고 잠도 못 자며 도박을 하니 산 송장처럼 보이는 게 당연했죠. 하지만 저는 날이 갈수록 키가 커지고 덩치가 커졌어요. 아버지를 닮았거든요.

그날은 제가 처음으로 폭발한 날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평소보다 더 술에 취한 상태였어요. 오자마자 폐악질을 해댔죠. 돈 가져오라며 소리 지르면서 손에 잡히는 걸 모두 집어던지고 있었어요.

제가 성년에 가까워지면서 돈을 가져가기가 힘들어졌거든요. 그래서 한동안 돈을 제대로 못 챙겨갔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혼자 화를 내다가 지치면 아무 데나 누워서 잘 거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줄 몰라 하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달리 신경도 안 쓰고 제 할 일을 하고 있었어요. 아버지가 자다가 깨면 대충 얼마 쥐어주고 보내려는 생각이었죠. 그 모습이 참 거슬렸나 봅니다.

아버지가 저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오자 무슨 일이 날 거라는 걸 직감한 할머니가 앞을 막아섰습니다. 아버지는 눈에 보이는 게 없었는지 할머니를 밀치고 저에게로 걸어왔어요. 할아버지도 예외는 없었죠.

제 앞에 선 아버지는 예전처럼 커 보이지 않았습니다. 제 눈에 아버지는 안중에도 없었어요. 아버지에게 밀쳐져서 깨진 유리에 손을 다친 할머니밖에 보이지 않았죠 저는 아버지를 지나쳐서 할머니에게 다가갔습니다.

” 할머니! “

할머니의 손에서 나는 피를 지혈하고 있는데, 이게 어딜 건방지게라며 아버지가 절 돌려세우시더라고요. 아버지가 저에게 손을 들어 올리는 순간 할아버지가 나서셨습니다

” 그만해 이놈아!”

할아버지가 큰소리 내시는 걸 처음 봤어요. 아버지도 당황한 눈치였지만 기죽지 않았습니다. 늙은 노인이 뭘 할 수 있냐는 반응이었어요. 아버지가 잔뜩 성난 얼굴로 할아버지에게 한 발자국 다가갔을 때 저는 아버지와 할아버지 사이를 가로막으며 아버지를 제지했습니다.

” 그만 좀 하세요! 우리가 대체 뭘 잘못했어요?! 왜 잘못은 아버지가 하고 피해는 우리가 봐야 돼요?”

아버지는 자기보다 훨씬 덩치가 큰 제가 분을 내며 말하니 주춤하는 기색이었습니다.

” 왜요?! 나이 먹은 부모님은 안 무섭고 다 큰 자식은 무서워요? 덩치도 작고 어렸을 때는 저도 막 대하더니, 이제는 제 눈치를 보시네요? 사람이 왜 이렇게 비겁해요? 당장 나가요! 한 번만 더 찾아오면 그다음부터는 저도 아버지처럼 할 거예요”

이렇게 글로 적으니 당시의 상황이 잘 전달되지 않네요. 말만 저랬을 뿐이지 그때 저는 혈기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아버지에게 담고 있던 모든 분노가 터진 날이었어요. 아버지는 그걸 느꼈는지 그날 이후로 저희를 찾지 않았습니다.

조부모님도 더 이상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셨죠. 아버지를 향한 제 분노를 직접 본 뒤로 아들에게 쩔쩔매었던 두 분의 행동이 저에게 상처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으셨더라고요.

19살의 겨울, 제가 원했던 건 빨리 성인이 되고 군대에 다녀와서 돈을 버는 것뿐이었습니다. 군대 면제는 불가능했어요. 조부모님을 부양할 수 있는 방법이 저뿐이었는데도 아버지가 있다는 이유로 군대 면제가 불가능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제 상황을 입증할 수 있는지 방법을 알지도 못했죠.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겠지만, 저는 친구와 여러 어른들에게 배신을 당한 트라우마로 인해 모든 일은 자신 스스로 해야 한다는 고집이 있었습니다.

도움을 청하지도 않고 도움의 손길조차 거부하는 겁쟁이였죠 저는 마음이 급했습니다. 할아버지는 그래도 괜찮으셨는데 할머니의 건강이 점점 안 좋아지고 있었거든요.

조금만이라도 입대를 늦추면 군대 안에서 할머니가 돌아가실 것 같았어요. 그래서 최대한 빨리 군대를 다녀와서 할머니를 보살피려는 생각이었습니다.

학교를 다니면서 일을 했어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세 식구가 먹고살기엔 택도 없었죠. 학생 신분으로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기도 했고요. 나이가 어리다고 임금을 떼어 먹는 악덕 사장들도 더러 있었습니다.

제가 사람을 못 믿게 된 데에는 이런 경험도 한 몫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졸업하고 군대에 가기 전까지는 막노동판에서 막일을 했어요. 적어도 군대에 가 있는 동안 두 분이 생활하실 수 있을 정도의 돈은 벌어둬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죠.

오전 오후에는 막노동 일이 끝나면 서빙 알바를 했었고 작업을 못하는 날이면 인력사무소에서 단기 알바라도 구해 그렇게 일했습니다. 어렵기에 가능했던 살인적인 일상이었죠.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정말 과로로 죽지 않은 게 다행일 따름입니다. 이렇게 고생해서 일을 했다. 보니 돈이 더 귀하더라고요. 그래서 허리띠를 졸라맸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 식사는 잘 챙기려고 노력했지만, 제가 밖에서 밥을 먹어야 할 때면 라면으로 대충 때웠어요. 굶는 날도 허다했습니다. 라면 하나를 사는 것도 아까웠기 때문이죠. 그렇게 1년 정도 일을 500만 원 정도가 모이더라고요.

저는 돈을 할머니 할아버지께 드리고 입대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 정도면 넉넉할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적은 돈이지만 군대에 가면 군인 월급도 나오고 말이죠.

군대에 가기 전에 해야 하는 일에는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한 가지는 돈을 모으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다른 곳으로 모시는 거였죠. 아버지가 모르는 곳으로 두 분을 모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평생을 동네에서 산 두 분을 먼 곳에 모실 수는 없었어요. 가뜩이나 연로하신 분들이 새로운 환경에서 적응하려면 더욱 힘들 테니까요.

그래서 살던 동네에서 많이 멀지는 않은 곳에 집을 구해 드렸습니다. 사람이 많이 돌아다니지 않고 멀리 나가지 않아도 장을 볼 수 있는 그런 곳이요. 할머니 할아버지는 살던 동네를 떠나야 한다는 것을 탐탁치 않아 하셨지만, 제 간곡한 부탁을 들어주셨습니다.

“내가 없으면 아버지가 다시 찾아올 거야. 제발 내 부탁 좀 들어 줘.. 할아버지..”

그렇게 두 분을 남겨두고 군에 입대했습니다. 신병 교육을 받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그렇게 첫 휴가를 나왔습니다.

한 달 치 월급을 들고 부랴부랴 할머니 할아버지를 찾아뵙었죠. 두 분은 생각보다 잘 지내고 계셨습니다. 한숨 돌리고 할머니가 차려주신 밥을 먹으려고 하는데 해가 져도 불을 안 키시더군요.

“할머니.. 왜 불 안 켜? 전기세가 아까워서?”

할머니가 우물쭈물하시더니, 전기가 끊겨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공과금이 밀려서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기어이 할아버지 할머니를 찾아온 아버지가 전기 배선을 끊어버리고 보일러까지 고장 내트린 거였습니다.

제가 분명 돈을 주고 갔을 거라며 찾아왔는데 할머니가 절대 돈을 내놓지 않자 그랬다고 했죠. 더 화가 나는 건 돈까지 가져갔다는 것입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잠깐 나가신 틈을 타서 온 집안을 헤집어 할머니의 통장을 가지고 나가거요 어차피 돈을 가져갈 거였으면 전기랑 보일러는 건들지 말지 할머니 할아버지는 그것을 고칠 돈이 없어 제가 나올 때까지 어둡고 춥게 지내셔야 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보니 괜찮아 보이기만 했던 할아버지의 건강 상태가 안 좋은 게 보였어요. 입대하기 전까지만 해도 할아버지는 할머니에 비해 건강한 편이었는데. 아버지와의 일을 겪으면서 심각한 스트레스로 인해 건강이 심하게 안 좋아지신 거죠.

저는 제가 가져온 월급으로 집의 배선과 보일러를 고쳐드렸습니다. 그걸 고치고 나니 남은 돈이 없더라고요. 할머니 할아버지는 일을 하면 된다고 그것도 어려우면 주변 사람들한테 도와달라고 하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일하면 된다는 말보다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으면 된다는 말이 너무 싫었어요. 사람은 믿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으니까요. 낳아준 자식한테도 이런 꼴을 당하는데 주변 사람들을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죠.

“다른 사람들한테 도움받으면 그만큼 돌려줘야 하는 게 당연하잖아. 이자까지 쳐서 갚으라고 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할머니는 저를 설득하셨어요.

“내가 이 동네에서 평생을 살았어. 기꺼운 마음으로 도와줄 사람이 있을 거야. 옛날에는 다른 집에 일 있으면 몰려가고 그랬어.”

하지만 저는 말을 듣지 않았어요.

“그런 사람들이 주변에 있는데, 왜 전기랑 보일러는 지경이야? 그런 사람들이라면 저런 것부터 도와줬었어야지.. 네 집 내 집 없는데 왜 이런 건 안 들여다봐?”

할머니는 아무 말씀도 못 하셨습니다. 저는 역시라고 생각하며 남은 휴가 기간 동안 막노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돈을 모아서 드렸어요.

“할머니 일단 이거 가지고 있어. 이걸로 할아버지 병원도 데려가고 할머니도 약 타 먹어 군대에서 월급 나오면 다 보내줄게”

할머니는 돈을 돌려주려 하셨습니다.

” 우리는 걱정하지 말어.. 월급 그거 얼마나 댄다고.. 거기서도 돈 써야 한다며 너 써 “

” 아니야. 할머니 요즘 군대에서 줄 거 다 줘 “

할머니는 제가 억만금이라도 주는 것처럼 미안해하며 돈을 돌려주려 하셨지만, 저는 돈이 두 분이 살기에 충분치 않은 돈이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불편한 마음을 안고 부대로 돌아갔고 그래도 잘 적응하려고 노력했어요. 또 군 생활을 잘하면 포상 휴가라는 것도 받을 수 있다는 말에 남들보다 몇 배는 더 열심히 군 생활했던 것 같습니다.

특출난 재능이 없는 제가 할 수 있는 건 유일한 장점인 성실함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이었어요. 그리고 군대는 성실함을 인정해 주는 곳이었죠. 예쁨도 많이 받았습니다.

노력하는 만큼 인정받을 수 있다는 확신은 걱정만 가득한 군 생활에서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동기부여였습니다. 그런데 저를 그렇게 예뻐하는 선임과 부사관들도 저에게 딱 한 가지 바라는 게 있었어요.

” 너는 모든 걸 다 혼자서 하려고 하더라 도움 받을 때는 받아. 다른 애들이 못 미덥냐? 전우를 못 믿는데 그게 무슨 군인이냐?”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된 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 좀 더 편할 수 있는 혼자서만 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도 벅차 보였던 것이죠.

힘들 게 뻔한데 그걸 어떻게든 해내고자 아등바등 대는 모습이요. 나중에는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했다고 했습니다. 제대 후 만난 동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처음에는 미안했어. 너가 우리 대신 일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너가 할 일을 다 해버리면 남아있는 애들은 뭐가 되냐? 나중에는 너가 우리를 무시한다는 생각도 했었어. 우리가 이런 것도 제대로 못하는 줄 아나, 우리가 못 미더워서 지가 다 해버리는 거 아닌가, 이렇게 생각했다니까?”

저는 제가 다른 사람들이 해야 하는 일을 대신해주면 좋아할 줄 알았습니다. 어쨌든 몸이 편하니까요. 제가 사람을 못 믿는 것도 있었지만 어차피 남들도 일하는 걸 싫어할 거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어차피 싫어하는 거 내가 대신 해주면 좋아할 테니 그냥 내가 다 해도 되겠지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죠.

” 미안하다 내가 그렇게 하는 게 애들한테 더 나을 줄 알았어. 동기는 술을 한 잔 마시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처음에야 그랬지 너 사정 다 알고 나서부터는 아무도 그렇게 생각 안 했어. 그냥 안타까웠지…”

동기가 말한 사정이란 건 이런 거였습니다. 제가 아무도 믿지 못하고 있을 때 동기가 제 사정을 알게 된 일이 벌어졌습니다.

저를 부르는 호출에 급히 가보니 묘한 긴장감이 돌았어요. 긴장한 상태로 서 있는데, 간부가 말했습니다.

” 집에 갈 준비해라 “

무슨 말인지 생각해 보고 있는데, 생각이 정리되기도 전에 저를 부른 이유를 알게 되었어요.

”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무슨 정신으로 할아버지에게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할아버지의 장례식이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저는 조문객을 받고 있었어요.

점차 현실이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아… 할아버지가 진짜 돌아가셨구나.. 할아버지는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거구나… 다시는 볼 수 없구나..”

라는 생각이 들자 그때부터 슬픔이 몰려왔죠 그동안 할아버지에게 못 해드린 것만 생각났습니다. 군대 가기 전에 모은 돈으로 할아버지랑 맛있는 밥 한 끼 먹을 수도 있었는데, 돈을 모아서 드리는 게 더 잘하는 일일 거라고 생각하면서 맛있는 식사 한 번 못 챙겨드린 게 너무 죄송했어요.

제가 일하는 게 힘들다고 투정 부릴 때 할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미안했을까? 마음도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제야 후회한들 뭐가 달라졌을까요?

할아버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고 저는 할아버지를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되었는데요. 그런 와중에 기억나는 건 저를 찾아와 준 부대 사람들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알려준 간부부터 저와 연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와주셨던 것 같네요.

”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

” 힘내야지 할머니 잘 챙겨드리고..”

” 네 …”

그런데 군대에서 사람들이 온 그날 하필 그날 아버지가 찾아왔습니다. 힘없이 누워있던 할머니는 아버지를 보시곤 득달같이 일어나 달려가셨어요.

” 야 이놈아 너가 무슨 염치로 찾아와? 너가 무슨 염치로! “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할머니를 말렸습니다. 또 제대로 못 먹은 할머니는 온몸에 힘을 쓰며 소리치셨습니다.

“우리가 너한테 얼마나 잘했니? 니 아빠가 너한테 얼마나 잘했냐고?! 뭘 더 얼마나 해줘야 하냐? 결국 니 아버지 목숨까지 뺏어가는구나”

할머니는 결국 실신하셨습니다. 할머니를 급히 병실로 옮기고 아버지를 마주했는데 아버지는 할머니가 쓰러지신 것은 안중에도 없어 보였습니다. 그리고 건강해 보이셨어요. 그래서 물었습니다.

“건강해 보이네요? “

아버지는 혀를 차며 제 옆으로 지나갔습니다.

” 자식 새끼라고 하나 있는 길 지애비 보고 인사도 안 하네. 애 교육을 이따위로 시켜놨으니 원”

라는 말을 하면서요. 눈이 돈다는 말을 그날 직접 경험했습니다. 말을 듣자마자 세상이 뒤집힌 것처럼 화가 나더군요. 당신이 버리고 간 자식을 나이 많은 부모가 이렇게까지 키워놨는데 무슨 염치로 부모를 욕하고 나를 무시하느냐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어요.

저는 자리에서 아버지를 돌려세웠습니다.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 그때 저를 막아서는 손들이 있었어요. 부대 사람들이었죠.

“아무리 그래도 안돼”

전 놓으라면서 소리를 치고 울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감사한 분들이죠. 자리에서 제가 주먹을 휘둘렀다면 저나 아버지나 다를 바가 없는 사람이 되었을 테니까요. 아버지가 저를 똑똑히 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눈을 부라리며 달려들자 저를 향해

” 너 내가 한심하지? 그런데 넌 이렇게 안 될 것 같냐? 니 몸에 흐르고 있는 그거 나랑 똑같은 거고, 니 눈 코 입 다 내가 준 거야. 봐봐 너랑 나랑 닮았잖아. 나 무시하지 마 너나 나나 똑같아 이 자식아! 니가 내 피 물려받고 태어난 이상 어쩔 수 없는 거라고”

라고 말하면서 낄낄거리며 저를 조롱하자 사람들은 아버지를 쫓아냈습니다. 저와 아버지를 한 공간에 두었다간 사달이 날 거라고 생각한 거죠. 아주 지혜로운 선택이었습니다. 정말 무슨 일이 났을지도 몰라요.

아버지가 장례식장을 휘저어 놓고 돌아간 날 할머니는 끙끙 앓았고 저는 분노를 삭이며 하루를 보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부대 사람들은 그때 알았을 거예요. 제가 자라온 집안이 평범하지 않다는 사실을요.

다행히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완전히 보내드릴 때까지 제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제 눈앞에만요. 아버지가 조의금을 모두 가져가 버렸다는 걸 알았을 때는 할머니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였습니다. 분노가 가시지 않더라고요.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전기와 보일러를 끊었을 때를 기점으로 쇠약해지셨습니다. 제가 사실을 알면 걱정할까 봐 전기와 보일러를 고치기 위해 저에게는 말 한마디 없이 고령의 몸을 이끌고 일을 했던 분이시라는 거죠.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죽음과 연관이 되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그리 모질게 대했던 주제에 할아버지의 조의금을 가져가 버렸다는 사실에 더욱 분노했어요.

얼마 되지 않는 금액이었지만 조의금은 아버지에게 돌아갈 것이 아니었습니다. 역시나 제 아버지는 염치가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아버지를 찾으려 했지만, 저에게는 할머니를 집에 무사히 모셔다 드리는 시간도 부족했습니다.

노력은 해봤지만 대체 어디로 그렇게 숨는 건지 뒤통수도 못 찾겠더라고요. 그렇게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 복귀했습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끝까지 불효했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습니다.

할머니가 잘 계시는지 살피는 방법이 전화 통화밖에 없다는 사실도 달라진 건 없었죠. 그렇게 시간이 흘러 휴가를 나오게 되었고 저는 또 한 번 좌절을 겪었습니다.

문을 열고 할머니가 계신 집으로 들어갔는데 할머니가 바닥에 쓰러져 계셨어요. 할머니는 숨은 쉬고 있었지만 의식은 없는 상태였습니다. 집 안은 왜 이리 차가운지 보일러를 고치고 나갔는데도 이상하리 만큼 차가웠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건 할머니가 돈을 아끼고자 보일러를 틀지 않았다는 사실이었어요. 저는 할머니를 모시고 급히 병원에 갔고 할머니가 지독한 감기에 걸리셨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할머니가 링거를 맞고 있는데, 의사가 저를 따로 부르더라고요. 의사는 조금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 대체 뭘 어떻게 한 겁니까? “

” 네?”

” 영양실조입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영양실조가 말이 됩니까? “

할머니가 많이 야위었다고 생각은 했지만, 설마 영양실조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정말 상상도요. 의사의 말처럼 요즘 같은 시대에 영양실조는 말이 안 되니까요. 저에게 영양실조라는 단어는 생소하기 그지없는 단어였습니다. 저는 곧장 입대 전에 매일같이 들렸던 인력사무소로 갔습니다.

” 웬일이냐? 너 벌써 전역이야?”

” 아뇨 일 좀 하려구요. “

인력 소장님은 귀신이라도 본 표정이었습니다.

” 휴가 나왔는데 왜 노가다를 해? “

” 네. 사정이 있어서요. 휴가 나와서 어떻게 놀 수 있었겠어요. 놀만한 친구도 없고 돈도 없는데요. “

그동안 할머니에게 보내드렸던 돈은 어디 갔는지 흔적도 없고 할머니는 영양실조에 걸렸고 인력소장님은 더 이상 사정을 묻지 않으셨고 일을 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 사이에 알게 된 건 제가 보냈던 용돈을 아버지가 가로채고 있었다는 거였어요.

어떻게 사람이 그리 악랄할 수 있는지 인간 같지도 않은 사람의 피가 저에게도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끔찍할 정도로 힘들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제 삶의 목표는 딱 하나였어요.

할머니가 남은 여생을 편안하게 보내는 것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만 살자 그리고 이후엔 다 내려놓자가 제 목표였습니다. 그러면 안 되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그렇게 막일을 하고 있는데, 그곳에서 반가운 얼굴을 만났습니다. 제가 신병 시절 아주 잠깐 함께 군 생활을 했던 고참 선임이었죠.

야! 여기서 너를 다 만난다?! 세상이 참 좁긴 좁아~ 그치? “

괜히 죄지은 기분이더라고요. 휴가 나온 군인이 막일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선임도 그게 궁금했나 봅니다. 당연하죠.

” 그런데 너 휴가 아니? 여기서 뭐해? 발써 전역한거야? “

선임은 집요했어요. 일이 끝나면 저를 졸졸 따라왔죠.

” 무슨 일 있냐니까? 무슨 일이길래 어린 놈 얼굴이 그래?”

선임은 늦게 군대 입대해서 저보다 7살이 많았습니다. 해외에서 유학을 하느라 입대가 늦어졌다고 했어요. 저는 집요하게 물어오는 선임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털어놓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왜 휴가를 나와서 일을 하고 있는지를 얘기했어요. 그런데 대화를 하다 보니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고 있는 제 모습이 보였습니다. 처음으로 제 얘기를 누군가에게 자세히 털어놓았던 것 같네요. 선임을 다시 만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에 마음 편히 얘기했던 것도 같습니다.

장난스럽게 능글거리던 선임은 제 이야기가 시작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진지하게 얘기를 들어주었고 모든 이야기가 끝나자

” 말하기가 힘들었을 텐데 말해줘서 고맙다. 얼른가 할머니 뵈러”

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저는 그게 선임과의 마지막 날이 될 줄 알았어요. 그런데…

” 할머니 이거 뭐야? “

제가 부대에 들어가기 전까지 누군가가 매일 생필품과 음식을 보내주었습니다. 할머니는 그저 모른다라고만 말씀하셨죠. 부대에 복귀 하루 전 평소보다 일찍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저희 집으로 가는 사람이 누군지를 지켜보았어요.

그 사람은 바로 제 이야기를 들어준 선임이었습니다. 대체 왜 라는 생각이 머리 위를 둥둥 떠다녔고 저는 저희 집에서 나오는 선임을 붙잡았습니다. 선임은 매우 놀란 눈치였습니다.

” 어… 야 …그게 뭐… 너가 불쌍하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너 얘기 들으니까 우리 할머니가 생각나서…”

라며 묻지도 않은 변명을 했죠. 저는 모습에 화가 난 게 아닌데도요. 막노동을 경험삼아 하는 선임의 할머니가 저희 할머니와 같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화가 나지 않았는데도 말이죠.

” 왜 도와주십니까? 저랑 인연이 깊은 것도 아니고 신병 때 잠깐 군 생활한 게 다인데…”

선임은 한숨을 푹 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 아직도 이러고 있었냐? 너 처음 들어왔을 때 도움 좀 받고 살라고 했지? 군 생활 좀 하면 나아졌겠거니 했는데.. 넌 들어왔을 때부터 신경 쓰이는 놈이었어.

나보다 한참 어린 게 죽을 상을 해 가지고 한숨이나 푹푹 쉬고 무슨 일이 있냐고 하면 말하지도 않고 강박증 있는 것처럼 모든 일을 혼자 다 해내려고만 하고 그런데 너 얘기 들어보니까 이젠 알겠더라.”

알 수 없는 생각들이 머리에 떠올랐다가 사라지길 반복했습니다.

” 그렇게 신경 쓰이던 놈이 내 눈앞에 딱 나타나더니, 그런 사정을 이야기하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어? 나 어차피 얼마 뒤면 한국 떠나 넌 이제 복귀해야하잖아. 그전까지는 내가 잘 보살펴 드릴 테니까. 걱정하지마 “

저는 이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집을 꺾지 못했습니다. 감사하다고 그렇게 하고 싶다는 마음이 가슴속에서 일렁였지만 이를 꽉 깨물고 말했어요.

“저는 괜찮습니다.”

평소 온화했던 성격으로 입망이 두터웠던 선임은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너 지금 방법 있어? 너 복귀하고 나니까 할머니 영양실조였다며? 고집 좀 부리지 마! 세상 혼자 사는 거 아니야. 너가 얼마나 상처받고 힘들었는지 아는데! 너가 할머니를 그만큼 위하고 사랑하면 할머니에게 최선의 선택을 해. 너 이거 너 욕심이야 “

선임과 헤어지고 난 뒤 부대로 복귀하고 나서도 이야기가 맴돌았습니다. ‘너 욕심이야’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말이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선임의 말이 맞더라고요. 저는 제 욕심으로 상황을 이렇게 만든 거였습니다.

할머니에게 너무 미안해서 그동안 혼자서만 버티고 살아온 시간이 너무 억울해서 나 자신 외에는 누구도 믿지 못하게 만든 이 세상이 미워서 아직도 어디선가 방탕하게 살고 있을 아버지가 미워서 이불을 덮고 끄꾹 울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때 저와 함께 지내던 사람들은 제 울음소리를 들었음에도 침묵해 주었습니다. 얼마 뒤 대대장님의 호출이 있어 급히 대대장님에게 가게 되었어요.

왜 저를 콕 찝어서 따로 보자고 하셨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갔습니다. 긴장감을 가지고 만난 대대장님은 저를 앉히시고는 차 한 잔을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 얘기 들었다 사정이 많이 안 좋다고..”

그동안 할머니를 살뜰히 챙겨주었던 선임이 다시 유학길을 떠나면서 군대에 이 사실을 알린 것이었죠. 군 생활을 잘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한번 이야기를 털어놓고 나니 두 번은 쉽더라고요. 저는 대대장님에게도 이 모든 이야기를 다시 꺼냈습니다. 대대장님은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리더니, 부하를 불러 이것저것 지시하기 시작하셨습니다.

” 옛 집으로 가서 할머니 어떻게 사시는지 보고 할 수 있는 조치 다 하고 와”

모든 일은 순차적으로 진행됐습니다. 발이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에 어떤 일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실시간으로 알 수는 없었지만 확실한 건 모든 사람이 대가 없이 저와 할머니를 돕고 있었고, 그들이 해주는 모든 일이 할머니의 생활을 좀 더 좋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는 거였습니다.

간부들이 한 가장 첫 번째 일은 아버지의 주민등록을 말소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사라지니 할머니가 정부에서 주는 보조금을 받을 수 있게 되었어요.

그리고 사회복지사를 연결해 주어 할머니가 전문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요양원에 모실 수 있도록 방법도 찾아주셨습니다. 이후엔 특별 외출을 허락해 주어 할머니를 만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할머니는 안색이 많이 좋아져 있었어요. 저는 함께 온 간부님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했습니다.

”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

“은혜 갚으라고 한 거 아니야. 정 갚고 싶으면 나 말고 다른 도움이 필요한 사람한테 갚아”

그때 제 마음속에 큰 변화가 생겼던 것 같습니다. 세상은 살만하다고.. 아직 믿을 만한 사람이 많다고.. 그리고 그동안의 내 고집으로 인해 할머니가 참 고생하셨다고요.

과일을 깎고 계시던 할머니에게 갔습니다.

“잠깐만 기다려라 이제 다 깎았어.”

저는 할머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할머니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곁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랐어요. 할머니는 기겁을 하시며 왜 이러냐 얼른 일어나라고 저를 일으키려 하셨습니다. 저는 고개를 저으며

“할머니 내가 미안해.. 그동안 잘못했어요..”

라고 말했고 어느새 제 얼굴은 눈물 범벅이 되었습니다. 할머니는 다 안다는 듯이 저를 꼭 껴안았고 저희는 한참 동안 함께 울었습니다. 한참 눈물을 흘리고 나서야 제 진심을 말씀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내가 조금만 빨리 마음을 열었어도 할머니가 이렇게 고생하질 않았을 텐데… 내 욕심 때문에… 할머니 너무 고생했어..내가 미안해 할머니.. 내가 조금만 더 빨리 깨달을 걸…”

또다시 울컥하는 감정을 다스리는데 할머니가 이어서 한 말은 결국 또다시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습니다.

” 괜찮아..”

이 말 한마디에 너무나 큰 진심이 담겨 있어서 저는 할머니의 사랑에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할머니는 이렇게도 말씀하셨어요.

” 내가 니 아비를 못나게 키워서 애먼 너가 고생했어. 니 아버지가 들어오는 날이면 눈치 보여서 잠도 못 자는 걸 보면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그래도 자식이라 끊어내지 못한 못난 할미 때문에 그래서 너가 이렇게 세상을 믿지 못하게 된 것 같아서 내 마음이 평생 불편했다. 그런데 이제라도 좋은 사람들을 만났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할미는 괜찮아.. 할미는 너만 행복하면 돼… 내 새끼 안쓰러워서 어쩌누..”

짧은 외출을 끝내고 부대로 복귀하는데 제 인생을 통틀어 그렇게 마음이 편한 날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복귀하고 나서도 할머니의 근황을 자주 들을 수 있었어요.

모두가 제 편의를 봐준 덕분이었죠. 이 일을 기점으로 달라진 것이 하나 더 있다면 저보다 두 살 많은 동기가 저에게 공부를 가르쳐주기 시작한 거였습니다.

사범대학을 다니는 동기가 제 사정을 어깨너머 듣더니, 조심스럽게 수능 준비를 제안한 것이었어요. 제대를 하고 취업을 하려면 못해도 전문대는 나와야 한다는 생각에 전문대를 목표로 수능을 준비했습니다.

동기와는 지금도 연락을 하고 지냈는데 만날 때마다 감사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때는 형도 어렸는데 일과 끝나면 쉬고 싶지 않았어요?”

이렇게 물을 때면 동기 형은 웃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 너 가르치는 게 쉬는 거였어. 나 사범대 다니는 중이었잖아. 교수법 실습도 해보고 좋다 싶었지”

간부들은 저와 할머니를 도와준 걸 일회성으로 끝내지 않았습니다. 돌아가면서 할머니를 뵈러 가주었고 그때마다 피로를 채워주었습니다. 저에게 할머니의 근황을 들려주기도 했습니다.

대대장님과 면담하는 날 이렇게 물었습니다.

” 저는 솔직히 이렇게까지 잘해주실 줄 몰랐습니다. 한 번만 도와주셔도 감사했을 텐데 이렇게 과분한 은혜를 입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대대장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한 번 전우는 영원한 전후고 부하를 챙기는 건 대대장의 몫이다. “

군대는 제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었습니다. 사람을 불신하던 제 모습은 이제 없었어요. 어느덧 시간이 흘러 제대날이 되었고 모두에게 인사를 건네고 문을 나서려는데 함께 생활하던 전우들이 봉투를 내밀었습니다.

” 뭐냐? “

” 황 병장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이건 감사의 표현입니다. 꼭 받아주시면 좋겠습니다!”

대체 뭐가 들었나 싶어 열어보려는데 꼭 부대 밖을 나가서 보라고 하더라고요. 편지라도 쓴 건가 싶어 작별 인사를 남기고 밖으로 나섰습니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면서 봉투를 열어보았는데 안에 있는 건 돈이었습니다. 사내 녀석들답게 짧게 남긴 편지에 자신들의 월급을 쪼개서 모았다며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 매일같이 공부하시는 모습 보고 많이 배웠습니다. 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시험 볼 때까지만이라도 공부에 집중하셨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조금씩 모았습니다. 꼭 받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대하면 후임이 아니라 동생으로 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라는 내용이었어요. 입대하기 전이었다면 당연히 거절했겠지만,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넘치게 받은 그때는 더 이상 호의를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열심히 공부했어요. 그리고 수능을 치렀습니다.

그리고 전문대에 입학을 했죠. 졸업장을 가지고 작은 회사의 사무직으로 들어갔는데 제 가장 큰 장점인 성실함과 여러가지 일을 하며 배운 일머리를 인정받아 관리직까지 올라갔습니다.

회사의 규모가 커지면서 다른 회사랑 합쳐졌는데 실무를 잘 아는 사람이 필요한 위치에 제가 발탁되었습니다. 지금도 성실히 일하며 실적을 내고 제 위치를 높여가고 있죠.

그리고 이렇게 번 돈을 가지고 저와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을 아이들을 돕고 있습니다. 제 아내와 함께요. 제가 가정을 꾸렸다면 놀라실까요? 저는 가정에서 받은 상처가 있기 때문에 가정을 꾸리는 것에 굉장한 부담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좋은 남편과 아빠가 될 수 있을 것이라 말해주는 좋은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렸습니다. 아버지 복은 없어도 아내 복은 차고 넘친다 생각합니다. 이 또한 참 감사한 일이죠.

할머니는 언제 그런 고생을 했냐는 듯 건강하게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양로원에서 또래 친구들도 만나시고 행복한 인생을 살고 계신다고 말씀하고 계세요.

그 연세에도 잘 지내시는 모습을 보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종종 할아버지 생각이 납니다. 지금까지 살아계셨으면 할머니와 함께 행복하셨을 텐데 자꾸 못 해드린 것만 생각나네요. 물론 할머니는 이 얘기를 들으면 경을 치시겠죠.

이쯤 되면 아버지 이야기가 가장 궁금하실 것 같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아버지는 제가 제대한 지 얼마 안 되어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렇게 저희를 괴롭혀 놓고 허망한 마지막을 맞이하셨더라고요. 모두가 업보라 말하는 마지막이었습니다. 쓸쓸하게 눈을 감은 아버지를 보러 갔을 때 통쾌함 같은 건 없었습니다. 그냥 어딘가 허탈한 마음이 들었어요.

할머니는 며칠간 말씀이 없으셨지만 금방 회복하셨어요. 제가 아이를 낳고 나니 할머니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되네요. 할머니는 말씀은 안 하시지만 마음속에 여전히 큰 돌덩어리를 안고 계실 것입니다.

이렇게 길게 제 이야기를 풀어서 써놓고 보니 참 다사다난한 인생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정말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제 지극히 작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읽어주시고 주의 깊게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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