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자매를 홀로 키우신 아빠가 사고로 불구되자..” 전교 1등이었던 내가 의대가는 걸 포기하려는 그때, 친언니가 건넨 ‘한마디’에 나는 목놓아 오열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엄마 얼굴을 잘 모릅니다. 내가 5살이 되던 해 엄마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빠듯했던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고자 식당일을 나가고 돌아오던 길에 차에 치였다고 합니다.

엄마가 떠난 뒤 일용직 노동자, 소위 말하는 노가다꾼인 아빠는 8살 배기, 5살 배기 딸 둘을 혼자 키우셨습니다. 

우리를 없이 키우지 않기 위해 아빠는 피눈물을 흘렸지만 애석하게도 아빠의 피눈물의 대가는 크지 않았습니다. 그냥 나, 언니,아빠 세 식구가 죽지 않고 살 정도였으니까요.

저는 어느덧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너무나도 예쁜 원피스를 입고 공주 같은 구두를 신고 누군가가 잔뜩 신경 써 준 머리를 하고 등교한 내 짝,  그런 내 짝의 외모에 홀려 우린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집에 놀러갔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집 벽에 곰팡이가 피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집에 신선한 과일이 준비되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집에 미끄럼틀을 놓을 수 있다는 것을,
내가 가난하다는 것을,

그렇게 저는 중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언니는 집이 가난했기에 대학은 일찌감치 포기해 상고를 갔습니다. 빨리 취직하고 싶다나… 나도 당연하게 언니처럼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때 저는 미래에 대한 꿈이란게 없었습니다. 꿈을 꿀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죠. 그래도 학교 수업은 열심히 들었습니다.

그냥 심심해서, 할 일이 없어서…아니, 어쩌면 초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이 말씀하신 내가 가진 재능이 내 인생을 바꾸어 줄지도 모른단 기대감도 들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공부를 열심히 시작했고 시험 결과, 전교 1등을 했습니다. 내 재능이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이 현실로 다가온 첫 번째 순간이었죠.

중학교 시절을 공부 잘하는 아이로 보낸 나는 지역에서 공부 잘 하기로 소문난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첫 고등학교 시험에서 전교 2등을 했습니다.

자부심이 컸습니다. 학원 하나 안다니고 나라에서 주는 돈으로 문제집 야금야금 사서 전교 2등을 했다는 게…. 저는 “계속 공부하면 되겠다. 우리 가족에게 많은 돈을 벌어다 줄 수 있겠다” 생각하며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아빠가 건설현장에서 사고가 났습니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는 더이상 공부를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고 당장 나 하나 일을 안 한다면 일 년에 한 번 새해를 맞아 다 같이 모여 먹는 두 마리에 8,000원짜리 바싹 마른 전기구이 통닭을 못 먹게 되는 정도의 가난으로 끝날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날 저는 눈이 퉁퉁 붓고 목이 쉴 때까지 엄청 울었습니다. 그런 저를 언니가 꼬옥 안아줬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구원과도 같은 말을 해줬습니다.

“돈은 언니가 어떻게든 벌어볼테니까…
넌 꼭 공부해
개천에서 용 한번 제대로 가봐야지…”

언니가 너무 고마웠고 너무 미안해서 죽을 지경으로 공부했습니다. 정부에서 주는 돈으로 문제집을 샀고 언니가 보태준 돈으로 인터넷 강의 무제한 수강권을 구입해 이를 악물고 공부했죠.

저는 힘들어하고 슬퍼할 겨를이 없는 고3을 보냈습니다. 나에겐 두 번의 기회는 절대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죽어라 공부만 했습니다.

그리고 아빠가 싸준 기름범벅 김치볶음밥을 싸들고 수능장으로 향했습니다. 수능이 끝난 후 집에 돌아가 채점을 할 때까지 계속 다리를 떨었습니다.

언니랑 아빠가 나를 위해 희생해 준 것이 아무 소용이 없어질까 봐 두려웠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심호흡을 하고 채점을 시작했습니다.

언어영역 2점짜리, 지구과학 2점짜리에 X표가 쳐져있는 가채점표를 붙들고 온 가족이 목놓아 울었습니다. 아빠도 엉엉 울며 언니와 나에게 사과했습니다.

언니와 내가 그렇게 가자고 조르던 아웃백 한 번 못 데려다준 못난 애비 밑에서 잘 커줘서 너무 미안하다고…

그리고 몇 달 후 나는 연세대 의대생이 됐습니다.   ‘현역 정시 연의’라는 여섯 글자가 참 대단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근 세 달 열심히 과외해서 밀린 월세 300을 갚고도 400만 원이나 남았습니다. 

남은 돈을 나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바친 언니와 아빠에게 남은 돈을 반반 나눠 줬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빠가 아웃백을 사주셨습니다.

그것도 4인 랍스터 세트로.. 언니와 내가 파스타와 스테이크, 랍스터까지 먹는 모습을 본 아빠는 또 하염없이 펑펑 우셨습니다. 

아빠가 울어서 나랑 언니도 또 울었습니다. 그렇게 울면서 4인 세트의 모든 음식을 다 먹었습니다. 배가 찢어지게 부를 때까지 음식을 먹어 본 건 처음이었습니다. 

그리고 배가 찢어질 때까지 음식을 먹어 본 아빠와 언니의 모습도 처음이었습니다. 인생의 한 줄기 빛이 열린 우리 모두의 모습이 너무나도 행복해 보였습니다.

전 그날 다짐했습니다. 우리 아빠 우리 언니에게 생일이 아니라, 새해 첫날이 아니라 , 무슨 특별한 날이 아니더라도 그냥 아무 이유 없이 먹고 싶을 때 아웃백에 가서 4인 랍스터 세트를 시켜 먹을 수 있는 인생을 선물해 주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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