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디(가명)씨가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에 이사 온 건 11년 전입니다.
평소 떡 만드는 걸 좋아했던 잔디 씨는 직접 콩가루떡과 시루떡을 쪄서 이웃들에게 이사 기념으로 선물했는데 유독 윗집 803호 할아버지가 “요새 이런 집 흔치 않은데” 하시면서 무척 고마워하셨죠.
그런데 위아래층에 떡 배달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현관문 손잡이에 검은 비닐봉지가 걸려 있었습니다.
봉지 안에는 작은 호박 2개와 호박잎 그리고 ‘반가워요’라고 적힌 쪽지가 들어 있었습니다.
잔디 씨는 ‘왠지 803호 할아버지인 것 같은데’라고 생각했죠. 며칠 뒤 동네를 산책하는 할아버지와 마주쳤습니다. 물어봤더니, 역시나 호박밭 쪽지의 주인은 할아버지였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와 함께 있던 할머니는 거동이 불편해 보였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뇌졸중으로 쓰러졌던 터라 말이 어눌하고 홀로 다니기 어려운 상태라고 하셨죠.
이후 몇 차례 우연한 만남을 거듭하면서 잔디 씨는 그 산책이 아침저녁으로 반복되는 부부의 일과이며 할아버지가 할머니의 건강을 위해 고집을 부려 시작된 일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날의 일기예보에 딱 맞는 할머니의 옷차림은 모두 할아버지가 정성껏 챙겨주는 것임을 알 수 있었죠.
이렇게 시작된 803호 할아버지와의 인연은 일정한 패턴을 반복했습니다. 잔디씨가 손수 만든 음식을 들고 찾아가면 얼마 후 잔디 씨의 현관 이에는 검은 봉지가 걸려있었죠.
할아버지는 봉지에 김부각을 넣기도 했고 깻잎과 콩잎을 담기도 했습니다. 잔디 씨는 그러지 마시라고 여러 차례 만류했지만, 할아버지는 무엇으로든 꼭 답례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잔디씨가 혼자 집에 있었는데, 위층에서 쿵 소리가 들리는 겁니다. 불안한 마음에 올라가 문을 두드렸는데 인기척이 없었고 잔디씨는 곧장 119에 신고했습니다.
구급대원과 함께 문을 뜯고 들어간 집에는 할머니가 쓰러져 있었죠. 외출했던 할아버지는 뒤늦게 병원으로 달려왔고 조금만 늦었으면 위험했을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말을 듣는 동안 할아버지는 잔디씨의 손을 꼭 붙잡고 감사하다며 연신 말했습니다.
그날부터 할아버지는 매일 새벽마다 주차장으로 내려가 잔디씨네 차를 몰래 세차했습니다. 어쩌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잔디 씨가 깜짝 놀라 펄펄 뛰며 말려도 차를 주차장 구석에 숨기듯 세워놓아도 할아버지는 어떻게든 찾아낼 세차를 했죠.
잔디씨의 남편은 “주말마다 세차하는게 제 취미인데 할아버지가 해 버리시면 제가 심심해요!”라며 한참 떼를 쓴 뒤에야 할아버지는 새벽 세차를 멈췄습니다.
대신 잔디씨의 문고리엔 검은 봉지가 더 자주 모습을 드러냈죠. 그리고 얼마 후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홀로 남은 할아버지는 자식들의 집으로 옮겨가게 됐습니다. 할아버지가 아파트를 떠나는 날이 다가왔고 갑작스러운 이별에 잔디씨는 아쉬워하고 있을 때 늘 봉지만 걸어두고 돌아가던 할아버지가 잔디씨 집의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그리곤 옥가락지 하나와 은가락지 하나를 내밀며 이렇게 말씀셨습니다.
“내가 아들만 둘인데 막내딸 생긴 기분이어서 좋았어.
집 정리를 하느라 붙박이장을 치우는데
서랍 틈에 딱 이거 두 개가 남아 있더라고.
할머니가 막내딸 생겼으니 주라고 남겨둔 것 같아서 들고 내려왔어“
그렇게 ‘못받는다’, ‘받아라’. ‘절대 안 된다’라며 치열한 실랑이가 이어졌지만 할아버지는 “이러다 나 기운 빠져서 쓰러지면 책임질 거냐”는 할아버지의 협박에 잔디 씨는 백기를 들고 말았습니다.
아쉬운 이별을 뒤로 한 채 시간은 흘러갔고 할아버지가 떠난 803호에는 신혼부부가 이사 왔습니다.
제법 세월이 지났는데도 잔디 씨는 여전히 문득문득 할아버지가 떠오른다고 합니다.
이제 40대 후반이 된 지금도 잔디씨는 문득 할아버지가 떠올라 온라인 커뮤니티에 이런 사연을 적으며 할아버지의 안부를 궁금해했습니다.
“엘리베이터에서 이웃과 인사할 때면 할아버지가 생각나요. 엘리베이터만 타면 누구에게든 고개 속여 먼저 인사하시고 별일 없냐고 물어봐 주시던 할아버지 덕분에 저희 동내 사람들은 요즘도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면 꼭 인사를 나누거든요. 803호 할아버지 잘 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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