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동안 폐지주워 팔며 날 키워온 할아버지가..” 유괴범으로 체포되었고, 사실을 묻는 내 말에 할아버지가 건넨 ‘한마디’에 경찰서는 눈물바다가 되고 말았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요리사로 일하고 있는 여성이에요. 올해 결혼해서 지금 한창 신혼생활을 만끽하고 있죠. 저는 주변 사람들에게 제 과거에 대해 잘 이야기하지 않아요.

친구가 많은 편도 아니지만, 그래도 정말 가까운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냥 평범하게 자랐다고만 얘기하죠. 사실 제 어린 시절은 그리 평탄하지 않았거든요. 그렇다고 불행했던 건 아니에요.

저에겐 저를 끔찍히 사랑해 준 분이 계시니까요. 바로 제 할아버지예요. 할아버지는 제 유일한 가족이었어요. 제가 기억하는 한 저는 늘 할아버지와 함께였어요. 할아버지는 저를 사랑으로 감싸 주셨죠.

저에겐 부모가 없었거든요. 소위 말하는 고아였죠. 할아버지는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시며 절 키우셨어요. 나이가 드시고는 폐지도 주워다 팔고 업체에서 야채랑 과일을 받아다 트럭에 싣고 다니며 팔기도 하셨죠.

그래서 저는 아기 때 사진이 없어요. 할아버지께서는 그래도 어린 시절 모습은 남겨놔야 한다시며 6살 이후론 생일 때마다 사진관에 데려가 사진을 찍어주셨어요.

그래서 1년 간격으로 성장을 기록하듯 찍어둔 사진을 몇 장 가지고 있죠. 저는 유치원도 다니지 못했지만, 입학 전에 배워야 할 한글이나 숫자 등은 다양히 익힐 수 있었어요.

할아버지는 가난했지만, 동네에서 평판이 좋은 분이셨거든요. 그래서 동네 아주머니들은 영감님이 손녀를 데리고 사느라 고생이 많다며 자진해서 저를 데려다 돌봐 주셨어요.

그래서 따뜻한 밥도 먹고 아주머니 댁에 있는 언니 오빠들과 놀면서 이것저것 배울 수도 있었죠. 저녁이면 일을 마친 할아버지가 저를 데리러 오셨구요.

할아버지와 제가 살았던 집은 방 하나에 화장실과 주방이 딸린 허름하고 좁은 곳이었어요.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더운 집이었죠. 하지만 할아버지와 둘이 살기에는 그리 불편하지 않았어요.

할아버지는 여름엔 고물상에서 주워온 선풍기를 고쳐서 틀어주셨고 겨울에는 주워온 이불과 담요를 깨끗이 빨아서 더 없는 살림에도 늘 저를 위해 최선을 다하셨죠.

할아버지와 제가 살던 동네는 다들 형편이 고만고만했어요. 그중에서도 우리 집은 조금 더 형편이 안 좋았고요. 그래서 동네 사람들의 도움을 많이 받고 살았어요.

초등학교 입학식에도 동네 아주머니가 부모님 대신 와 주셨고 학교 공개 수업 때도 할아버지 부탁을 받은 동네 분들이 돌아가며 와 주셨어요. 소풍 날엔 도시락까지 싸 주셨죠.

손재주가 좋으셨던 할아버지는 그런 고마움에 대한 보답으로 동네분들 집에 고장난 기계를 고쳐주시곤 하셨어요. 일종의 품앗이처럼 서로 도우며 살았죠.

그렇게 화목하고 서로 잘 어울리는 울리는 동네였지만 그래도 뒷얘기가 도는 건 어쩔 수 없었어요. 특히 저와 할아버지는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는 단골 이야깃거리였죠.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기에 할아버지가 어려운 형편에 손녀딸을 키우고 사나 궁금하긴 했을 거예요. 할아버지는 제 부모님에 대한 얘기를 해주신 적이 없어요.

자라면서 때때로 엄마 아빠는 어디에 있냐고 묻곤 했지만, 그럴 때마다 할아버지는 제가 태어나고 바로 하늘나라로 갔다고만 하셨거든요. 그래서 저도 그런 줄로만 알았어요.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만 해도 암 같은 치료하기 힘든 병에 걸려 돌아가신 줄 알았죠 그런데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니 제 귀에 여러 말들이 들려오더라고요. 주된 소식은 아주머니들이었죠.

“모르긴 해도 영감님 결혼 안 하셨을걸? 영감님이 이 동네 토박이잖아. 근데 누구 하나 영감님네 할머니 얘기 들은 사람이 없다니까? “

이상했어요. 할아버지는 분명히 엄마 아빠가 아파서 돌아가셨다고 했는데, 그렇게 가깝게 지내는 동네 아주머니들조차 제 부모님에 대해 모르다니요.

게다가 제 할머니를 본 적도 없다는 게 당혹스러웠죠. 아주머니들 말씀대로 제가 태어나려면 부모님이 있어야 하고 그러려면 할머니도 있어야 하니까요.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우리 집에는 할머니는 물론 제 부모님으로 추정되는 사진조차 한 장이 없었어요. 저희 집에 있는 작은 앨범 안에는 1년에 한 번씩 사진관에서 찍어주고 제 사진과 동네 사람들이 찍어준 할아버지와 제 사진이 다였거든요.

중학교 입학하고 나서 사춘기 시절이 찾아오자 슬슬 반항기도 생기고 제 스스로의 정체성에 의문을 가지게 되었어요. 부모님 없이 딸랑 할아버지랑 같이 사는 저로서는 더더욱 그랬죠.

그러면 그럴수록 부모님에 대한 궁금증은 더 커져만 갔어요. 그러다 중학교 3학년 때였어요. 저는 날을 잡고 할아버지께 물었어요.

“할아버지 솔직하게 말해줘. 우리 엄마 아빠 어딨어? 죽었어? 아직 살아있어? 왜 사진 한 장도 없어? 할머니는 누구야? 왜 할머니 사진은 없어?

동네 아주머니들이 그러더라 할아버지는 이 동네에서 오래 살았는데 할머니는 본 적이 없다고… 할아버지 나한테 거짓말 한 거 있어?”

마치 범죄자를 취조하듯 추궁했어요. 나중엔 감정이 복받쳐 엉엉 울었죠. 할아버지는 그런 절 그저 달래주셨어요.

” 경희야 할애비가 너무 미안하다 그래도 한 가지 약속할 수 있는 건 너는 내 손녀라는 거다. 누가 뭐래도 내 손녀고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건 경희 너야. 사실 너희 엄마 아빠는 너를 키울 형편이 안 됐어 그래서 경희 너를 할아버지 집 앞에 놓고 떠났어 살아있다면 언젠가 너를 찾아올 거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제게 작은 팔찌를 꺼내 보여주셨어요.

“네 엄마 아빠가 남기고 간 거란다. 내가 산부인과 신생아실에서 차고 있던 것 같구나..”

그걸 보고 나니 의구심은 어느 정도 줄어들었어요. 엄마 아빠가 저를 버리고 간 건 맞지만, 그래도 할아버지만큼은 저를 사랑으로 키워주셨으니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죠.

그날 이후 저는 마음을 어느 정도 잡을 수 있었어요. 드디어 사춘기의 터널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한 거였죠. 대학에 갈 생각은 없었어요.

대학에 가기에는 저희 집 형편이 너무 어려웠고 할아버지한테 더 이상 부담드리기 싫었거든요. 그래서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일찌감치 제 진로를 결정해 버렸어요.

“할아버지 나는 요리사 하고 싶어 고등학교 3학년 때 취업반에 들어가서 조리사 자격증 따고 졸업 취업한 다음에 바로 취업할래”

할아버지는 대학 가고 싶지 않냐고 물으셨어요. 등록금은 어떻게든 마련해 주시겠다면서요. 저는 진짜 요리사가 되고 싶다고 하면서 미리 약을 쳐두었죠. 할아버지가 죄책감을 갖지 않도록 말이에요.

그렇게 저는 목표대로 고3이 되자마자 저희 학교와 연계된 직업학교에서 요리를 배우기 시작했고, 자격증도 여러 개 따게 되어서 졸업하기 한 달 전에 취업을 하고 졸업식 일주일 후에 첫 월급을 타게 되었죠. 첫 월급을 타던 날 저는 고기를 사들고 집으로 갔어요.

마음 같아서는 외식을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까지 하기에는 충분치 않은 돈이어서 그냥 고기를 사다 먹는 걸로 만족하기로 했죠.

고기와 쌈 채소를 사들고 집에 들어가자 할아버지 눈이 휘둥그레지셨어요. 저는 고기 내려놓고 바로 월급이 든 봉투를 드리면서 그랬어요.

“할아버지 이거 할아버지 용돈이야. 내 첫 월급에서 고기 사고 남은 돈이야”

할아버지는 말을 잊지 못하셨죠.

“난 이거 못 받는다. 경희 니가 얼마나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인데 이건 니가 써야지 할애비는 이 돈 절대 못 받는다.”

그리고는 봉투를 연신 밀어내셨어요.

“할아버지 이거 안 받으면 나 확 집 나가 버릴 거야. 왜 할아버지만 나한테 잘해주려고 해? 나도 할아버지 용돈 얼마나 드리고 싶었는데”

라며 으름장을 놓았죠 결국 할아버지는 눈물을 펑펑 쏟으시면서 봉투를 받아 드셨어요. 그리고는 봉투를 통째로, 할아버지가 즐겨 읽으시는 낡은 책 사이에 끼워 넣으셨어요.

평생을 함께 살아왔던 집에서 나란히 마주 앉아 고기를 먹는 게 참 색달랐어요. 더군다나 제가 처음으로 할아버지께 뭔가를 해드린 것 같아서 정말 뿌듯하고 기분이 좋더라구요.

그렇게 할아버지랑 수다도 떨면서 밥을 먹는데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났어요. 이시간에 누가 온 거냐 하고 묻는 할아버지를 뒤로하고 제가 문을 열었어요. 문 앞에는 놀랍게도 경찰관 두 명이 서 있더라구요.

“여기 정익원 씨 계십니까? “

저는 저희 할아버지라고 말했더니 저보고 유경희씨가 맞냐고 묻더군요. 저는 맞다고 대답했죠.

“저희랑 서로 좀 가주셔야겠습니다. “

“무슨 일인데요?”

“정익원 씨를 아동 유괴로 고발하신 분이 계셔서 저희와 같이 가주셔야겠어요. “

황당했어요. 아동유괴라니요. 할아버지가 왜 그런 끔찍한 범죄 혐의로 고발당한 건지 알 수가 없었죠. 저는 할아버지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했지만, 경찰들은 같이 가자는 말만 했어요.

결국 그날 밤 할아버지와 저는 나란히 경찰차에 몸을 실었어요. 경차서에 도착해서 안내받은 곳으로 가서 기다렸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할아버지는 차분해 보이시더라고요. 시간이 흐른 뒤 아까 경찰들이 돌아왔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사람들도 같이 왔더라구요. 50대로 보이는 여자와 손을 꼭 잡은 채 들어온 부부였죠 50대로 보이는 여자는 저와 할아버지 쪽으로 달려와서 외쳤어요.

” 맞아요. 이 영감님이 맞다니까? 그때 청소 일 하던 사람 맞아요. 이 영감님이 사장님들 딸을 납치한 거라니까요? ?

” 그게 무슨 소리예요. 우리 할아버지가 누굴 납치해요?”

제가 버럭 소리 지르자 경찰은 저와 아줌마를 진정시켰어요. 그 순간 뒤에 서 있던 부부 중 여자분이 제게 다가왔어요.

” 혹시 니가 경희니?”

하고 제게 물어보시는데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더라구요. 그 모습에 당황한 저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러자 여자분이 갑자기 저를 덥석 끌어안더니, 엉엉 울기 시작하는 거예요.

” 경희야 엄마야 엄마”

평생 들어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말에 저는 놀라고 당황했어요. 하지만 저를 더욱 당황시킨 건 할아버지의 태도였어요. 할아버지는 차분하게 일어나시더니,

“이제서야 왔구만 그래 이제 사는 건 괜찮은가?”

라고 하셨어요. 그때였죠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50대 여자가 그러는 거예요.

“아니 우리 보육원에서 애 납치해 놓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라며 펄펄 뛰었죠.

그 아줌마는 할아버지를 납치죄로 처벌해야 된다고 소리쳤고 저는 할아버지는 잘못이 없다고 항변했어요. 부부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었죠.

50대 여자는 자기가 운영하는 보육원에 부부가 찾아왔다고 했어요. 원장실에 찾아와서는 오래전에 이 보육원 앞에 아이를 두고 갔는데 데려가려고 왔다고 하더군요.

아이 편에 꼭 데리러 올 거니까 그때까지 잘 부탁한다는 쪽지와 출생신고 이름 등이 적힌 병원 서류들도 다 놓고 갔었다구요.

그당시 아이는 4,5살 정도였구요.

“어휴! 그런데 그런 애는 우리 기록에도 없고 입양간 기록도 없더라구요. 근데 그때 딱 생각난 게 있었어요. 오래전에 우리 보육원에서 애가 한 명 사라져서 난리난 적이 있었거든요.

경찰에 신고도 하고, 실종신고도 했는데 결국 못 찾았어요. 순간 딱 생각이 나더라고요. 우리 보육원에서 청소하던 영감님이 갑자기 그만뒀던 게 말이에요. 영감님이 평소 애들 앞에서 알짱거리고 그런 게 있어서 내가 기분이 나빠서 해고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그걸 알아채곤 선수 쳐서 그만뒀더라구요. 근데 보육원에서 애를 납치한 거였어! “

길길이 날뛰는 아줌마를 두고 저는 유전자 검사를 위해 조직 세포도 제공했어요. 그런 모습을 가만히 보던 할아버지는 정말 경희의 부모가 맞는가라고 물으셨어요. 경찰은 일단 유전자 검사를 해 봐야 한다고 했어요. 그러자 할아버지는

“경찰 선생 내가 유치장에 있으라면 있겠는데 내 얘기 좀 들어주게”

할아버지는 경찰관 손을 잡고 말했어요. 경찰은 어르신도 변론을 하실 권리가 있다고 말하더군요. 할아버지는 유전자 검사가 끝난 후에 부부가 내 부모님이 맞다면 얘기를 하겠다고 하셨어요. 경찰은 잠시 고민하다가 부부에게 의견을 물었어요.

부부는 어르신한테 얘기를 듣는 길이 그것뿐이라면 그렇게 하겠다고 하더라구요. 그렇게 유전자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할아버지는 불구속 상태로 집에 계셨어요.

저는 직장과 집을 오가면서 할아버지와 붙어 있었고요. 2주 뒤 검사 결과가 나왔어요. 결과는 99.99 프로 일치한다고 나왔죠.

저는 20년 만에 부모님을 만나게 된 거예요. 검사 결과를 들은 저는 얼떨떨어 이상하게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죠. 제 부모님이라는 그분들은 저를 끌어안고 엉엉 소리내 우셨어요. 그리고 보육원 원장은 저희 할아버지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소리쳤어요.

” 이제 영감을 납치죄로 집어넣어요. 누구 망하게 하려고 작정했나!”

하면서 날뛰었죠. 그리고 약속대로 할아버지는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어요. 할아버지는 집에서 챙긴 꽤 많은 양의 서류를 경찰관 앞에 하나하나 꺼내서 보여주기 시작했어요.

“나는 보육원에서 청소 일을 한 게 맞습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지요. 어느 날 새벽에 일을 나갔는데 보육원 앞에 어린아이가 웅크려 자고 있더군요. 부모가 버린 아이인가 싶었습니다.

아이가 추울까 봐 보육원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려고 했는데, 잠이 깼는지 새까만 눈동자를 반짝이며 제게 ‘할아부지’ 그러더라구요. 아이는 메고 있던 가방을 내밀더군요. 가방 안에는 인형과 여기 이 서류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모가 남긴 편지에는 꼭 데리러 오겠다는 말이 적혀있었죠.

저는 아이를 데리고 보육원으로 들어갔고 아이는 그렇게 보육원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청소 일을 하면서 저는 아이를 자주 봤어요. 대부분 아이의 얼굴은 어두웠어요. 왜 그런지 궁금했는데 한 달 정도 후에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저 원장이 아이를 유독 구박하더군요. 거기엔 이유가 있었지요 당시 보육원에 아이들이 많아서 재정이 어려웠는데 애가 들어와 밥그릇을 또 만드니 분풀이를 한 거였죠. 보니까, 어린애가 바깥에서 손빨래도 하고, 설거지까지 하더군요.

아이의 손이 빨갛게 터 있었습니다. 그래서 몇 번 원장실을 찾아가 그러지 마시라고 했더니, 글쎄 해고 통지를 하더군요. 그렇게 보육원을 나오는데 아이가 자꾸 눈에 밟히더이다. 그래서 그랬습니다”

할아버지는 그때까지도 제 부모의 편지와 서류가 담긴 가방을 메고 있었다며 원장은 서류들은 꺼내 보지도 않고 방치했다며 화를 내셨어요. 그게 절 납치한 이유였다구요.

그리고 그때부터 저를 손녀로 키우셨다구요. 잘못된 일이란 건 알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하셨죠.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경찰서는 충격에 빠졌어요. 저도 마찬가지구요. 유일하게 원장만 기세등등했죠.

“아니 영감이 미친 소리를 지껄이고 있어? 누굴 엿을 먹이려고 쑈를 해? 당신 내가 명예훼손도 고소할 거야!”

라며 길길이 날뛰었어요. 경찰은 할아버지가 한 진술에 증거가 있냐고 물었고 할아버지는 자신 있게 일어나셨어요. 그리고는 당시 함께 보육원에서 일했던 진주댁이라는 아주머니가 증인이라고 하셨어요.

경찰은 곧바로 진주댁 아주머니를 찾아갔고 증언을 받아오는 시간 동안 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모든 사실이 밝혀진 건 늦은 오후였어요. 진주댁 아주머니가 직접 파출소로 와서 증언을 해 주었거든요.

혹시 몰라 당시 제 사진도 찍어서 보관하고 계셨죠 빨갛게 팅팅 부은 제 손을 보자 엄마는 오열했어요. 그밖에도 원장한테 맞아서 턱 밑이 찍힌 사진도 있었죠. 빼도 박도 못할 증거에 원장은 궁지에 몰렸고 제 부모님은 당장 원장 고소하겠다고 했어요.

원장은 그제서야 싹싹 빌었지만 소용없었죠. 원장은 그날 바로 아동학대 혐의로 기소됐어요. 그리고 할아버지와 저는 집에 돌아갈 수 있게 되었죠.

그날 밤 부모님의 이야기도 들었어요. 아빠가 사업을 하려다 사기를 당해서 하루아침에 길바닥에 나앉게 되었고 도저히 저를 키울 수가 없어서 시설에 잠시 맡기려고 했었다구요. 저를 데려오기 위해 부모님은 열심히 일하셨고 살림이 조금 나아지자 보육원으로 찾아갔지만 저는 서류에도 등록되지 않은 채 사라지고 없었다고 하셨어요.

그러다 얼마 전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다시 보육원을 찾아갔고 그제야 원장이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면서 아이가 납치된 것 같다고 했더군요. 그래서 경찰에 신고를 하게 되었다구요.

원장은 모든 죄를 할아버지한테 넘기려고 벌인 짓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제가 부모님을 만날 수 있게 도움이 됐던 것도 사실이었어요.

그렇다고 용서할 수는 없지만요. 부모님이 지금처럼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은 건 몇 년 안 되었다고 했어요. 그동안 자식을 버린 죄책감으로 일만 하고 사셨는데 이제는 마음의 짐을 조금은 덜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셨죠.

이상하게 저는 부모님이 밉지 않았어요. 그냥 엄마 아빠를 드디어 만난 게 설레기도 하고, 긴장될 뿐이었죠. 밉지 않았던 건 할아버지 때문일 거예요. 할아버지랑 살면서 충분히 사랑을 받아왔기에 부모님에 대한 미움이 덜 했던 것 같거든요. 그래서 부모님께 두 분을 이해한다고 말씀드렸어요.

지금이라도 절 찾으러 와주셔서 고맙다구요. 그러자 엄마 아빠는 저를 안고 엉엉 우셨어요. 그리고는 할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할아버지가 아니었다면 제가 이렇게 잘 자라지 못했을 거라고요. 너무 늦었지만 감사드린다고요. 그리고는 앞으로 할아버지를 모시고 살겠다고 했어요.

할아버지는 한사코 사양을 하셨지만, 저희 부모님도 완강하셨죠. 결국 저와 할아버지는 부모님 집으로 들어가 살게 되었어요. 그런데 적응하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아무래도 함께 산 날보다 떨어져 산 시간이 너무 길었으니까요.

결국 부모님은 할아버지와 제가 살 집을 따로 마련해 주셨어요. 바로 부모님 옆집으로요 그제야 할아버지와 저는 예전처럼 편하게 살 수 있었죠. 퇴근 후에는 온 식구가 다 함께 모여서 저녁도 먹고 티비도 보면서 여느 가족처럼 시간을 보냈어요.

제가 결혼을 한 후에는 아예 부모님과 할아버지가 살림을 합치셨고요. 이젠 서로 불편할 것도 없는 한 가족이 되어 버렸거든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이를 20년 가까이 손녀로 키워주신 우리 할아버지…저는 우리 할아버지를 세상 누구보다 존경하고 사랑해요. 앞으로도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아주셨으면 좋겠어요.

Desktop*
X
error: Content is protected !!
Days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