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저는 홀로 자폐증 아들을 키우는 싱글맘입니다. 제 인생에서는 가장 특별한 우리 아들 이야기를 여러분께 좀 들려주고 싶어요.
“난 저런 아들 둔 적 없어! 내 아들인 거 맞아?”
처음 아이가 자폐증 진단을 받았을 때 남편이 처음 한 말이었죠. 태어났을 때는 뭐랄까 너무 소중하고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럽고 그게 전부였어요.
그냥 쪼끔 조용했던 거 오히려 조용한 아이라고 이런 애들은 한 번에 10명도 키우겠다고 주변에서 성하였죠. 무언가 다르다고 느껴지기 시작한 거 첫 돌쯤이었을까요?
아이는 조용하다 못해 너무 조용했고 불러도 반응이 없었어요. 엄마도 아빠도 할머니도 누구도 말하지도 부르지도 않았죠 옹알이가 크게 없었어서 그냥 말이 좀 늦으려나 보다 남자아이들은 조금씩 늦는다고 하니까 그런 거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록 무엇인가 잘못된 것을 느꼈죠. 놀잇감이라는 거에도 딱히 관심이 없더니, 갑자기 서랍장 손잡이에 꽂혀 종일 그것만 바라보고 있다거나 30개월이 되었는데도 말이 트이지 않는다거나 눈에는 늘 초점이 없고 아무리 부르고 얼굴을 붙잡고 들여다봐도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어요.
세 살이 되던 해 결국 다니던 어린이집에서 선생님이 전화했어요.
“어머니 아무래도 발달 검사를 한 번 받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
조심스럽게 꺼낸 한마디, 그저 남들보다 늦는 거라고 애써 부정하려던 세상의 벽에 마침내 부딪힌 듯한 순간이었어요.
그래도 혹시나 만약에 아닐 수도 있잖아. 실락 같은 희망을 잡고 아동 전문가를 만나 상담을 한 날,
“아들~ 여기 봐 장난감이네? 이거 봐 우와 재밌겠다. “
어떻게든 아들의 관심을 끌어 다른 아이들과 같다는 걸 보여주려고 애쓰는 저와 마치 공간에 제가 있지도 않은 듯 카펫의 얼룩만 보고 있는 제 아들 두려움은 점점 현실로 다가왔어요.
“아들 이거 봐 여기 이거 뭐야? 퍼즐이다. “
퍼즐 거의 울 듯한 제 얼굴을 물끄러미 한 번 쳐다보던 순간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 불안의 먹구름이 걷히려던 그때 제 아들은 제 얼굴을 한 번 보더니, 제 손에 퍼즐 조각 하나를 뚫어져라 보았죠.
그리고 그걸 자기 손으로 집어 가는 게 아니겠어요. 그때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헛된 희망을 부수어 버리듯 아이는 조각 하나를 다시 악가의 얼룩 옆에 놓아두더니, 또 한참을 하염없이 그것만 들여다보고 있었죠.
옆에서 그것을 보고 빠르게 뭔가를 기록하던 선생님, 그럼 그렇지 같은 뜻의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모습, 저는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았어요.
” 어머니 지금 언어발달도 전혀 안 되고 있고 또 이 아이는 다른 또래와의 상호작용이나 또래뿐 아니라 모든 사람과의 상호작용이 전혀 되지 않아요. 사회성 발달도 전혀 되어 있지 않아요. 상대가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감정을 읽어내지도 못하고 무엇보다 남들은 한 번에 이해하기 힘든 자신만의 무엇인가에 빠져있어요. 종합적으로 보았을 때 자폐 스펙트럼의 범주에 속하는 것 같습니다. “
“저희…저희 애가 저희 애가 자폐하라는 건가요? 그럼 평생 저렇게 살아야 한다는 건가요? “
” 약물치료도 있고 놀이치료도 받을 수 있어요. 학교도 다니고 일도 하는 친구들도 있고요. 완전히 낫는 건 아니지만, 보통 아이들과 함께 생활할 수 있도록 훈련을 받을 수 있어요. “
마지막으로, 버티던 방어벽마저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전문가의 소견에 의해 확정이 되어 버린 거예요. 그때는 그게 마치 내일 당장 죽는 희소병이라도 선고받은 것처럼 제 머리를 때렸습니다.
저는 모든 게 제 탓인 것만 같아 아이에게 미안하다며 길 위에서 한참을 울었습니다. 제가 울어도 눈 한 번 마주치지 않는 아이를 안고 말이죠. 집으로 돌아와 퇴근한 남편에게 검사 결과를 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내뱉은 제일 첫 마디가 바로 저것이었죠.
” 내 아들 맞아?”
” 여보 무슨 말을 그렇게… “
” 아니 내 아들인데 그럴 리가 없잖아. 우리 집은 이제까지 저런 병신은 한 번도 없었어! 아니면 너야? 너희 집이야?”
” 병신이라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아침까지도 그렇게 예뻐하더니, 어떻게 그렇게 말해?!”
” 야 솔직히 말해 내 아들 맞냐고!”
” 그래! 니 아들이다. 너랑 나랑 낳은 우리 아들이라구!”
” 난 저런 아들 둔 적 없어. 난 내 아들로 인정 못 해! 키우려면 너나 키워 난 못 키우니까”
” 요즘은 놀이 치료나 미술 치료도 있고 직장에 취직해서 남들처럼 사는 애들도 많대 그러니까…”
” 그니까 너가 그렇게 키우라고 세 살이나 돼서는 아직 아빠 소리도 못하는 거 어차피 나도 쟤 아빠였던 적 없으니까. 그렇게 키우고 싶으면 너 혼자 키워”
남편은 성질을 내더니, 그대로 집을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들어오지 않았어요. 아이는 슬퍼하지도 울지도 않았고 아빠를 찾지도 않았어요. 오히려 이럴 때는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남편이 이틀 째 집에 들어오지 않던 날 시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집으로 와라 얘기 좀 하자 “
무슨 일인지 알 것 같았어요. 저는 아이와 함께 근처에 사는 시어머니 집으로 갔습니다. 남편의 아버지는 어릴 때 돌아가셔서 어머님 혼자 힘들게 아들을 기르신 터라 원래도 아들에 대한 애착이 강하신 분이었어요. 무슨 말씀을 하실지는 뻔했죠.
” 저것도 데려왔니? “
” 저거라뇨? 어머니? 지난번 왔을 때랑 똑같은 제 아들이고 그이 아들이고 어머니 손자예요.”
” 그래서 넌 계속 키우겠다는 거니? “
” 당연한 거 아닌가요?”
어머니는 한숨을 한 번 쉬더니, 저와 아들을 번갈아 보고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 너 아직 젊다. 애는 다시 가지면 돼. 요즘은 보육원도 시설도 좋고 잘 되어 있다더라 해외 입양 같은거 가면 쟤한테 더 좋을 수도 있고”
” 어머니!!!!!”
” 이게 어딜 시애미한테 소리를 질러!! 내가 나 좋자고 이러는 거야? 내가 너도 딸같이 생각하니까 하는 말이다. 이대로 남편이랑도 헤어지고 장애인 애 키우느라 돈 쓰고 시간 쓰고 그렇게 평생 살래?!”
전 온몸이 부들부들 부들 떨리는 것을 겨우 참으며 말을 이었습니다.
“이럴 줄은 알았지만 혹시나 해서 왔던 건데 괜히 왔네요. 아이 병원 가기 전날과 똑같은 제 아들이에요. 저는 제 아들 포기 못합니다.”
” 니가 그렇다면 그래 그렇게 해라. 대신 내 아들은 포기해 난 우리 아들 저런 거 키우는 거 못 본다 양육비는 줄 테니까. 그렇게 키우고 싶으면 나가서 니 아들 니가 키우면서 살아라 “
” 네 그럴게요. 그럴 거예요. 이런 소리 하실 거면 오늘 괜히 왔네요. 이만 가보겠습니다. “
저는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들을 보니 속이 답답하면서도 이렇게 모진 소리들을 차라리 듣지 않은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싶었어요. 며칠 뒤 남편은 이혼 서류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 어휴 그놈의 고집! 진짜 애는 또 낳으면 되잖아. “
” 당신 진짜 소름끼친다… 어떻게 의사 말 한마디에 그렇게 180도 변해? 그깟 장애가 뭐라고 애를 버리겠다고? 니가 그러고도 사람이니? 양육비나 똑바로 보내 “
” 알겠으니까. 어디 가서 내 아들이라고 하지 마라. 우리 집안에 먹칠하기 싫으니까. 그럼 어디 한번 잘 키워봐라 “
남편은 마지막까지 잔인한 말을 수없이 내뱉었어요. 그래도 위자료의 개념으로 작은 원룸 하나를 구해주더군요. 그리고 어디 가서 절대로 제 아들이 남편의 아들이란 것을 말하지 않는다는 각서까지 쓰게 했어요.
남편도 시어머니도 어떻게 한순간에 그렇게 돌변할 수 있는지 그렇게 예뻐하던 아들 손주를 버리라는 말을 그렇게 쉽게 내뱉을 수 있는지 손바닥 뒤집듯 뒤바뀐 태도에 소름이 끼쳤습니다.
그런 가족이라면 저도 우리 아들과 함께하게 놔두기 싫었어요. 하지만 현실은 쉽지 않았습니다. 몇 년간 경력은 단절되어 딱히 내세울 학벌도 아니고 자격증도 없지 게다가 아들은 혼자 오랫동안 놔둘 수도 없지 이런저런 일을 쉽지 않았어요.
하지만 남편이 약속한 양육비도 있으니 생활비 약간만 벌면 되겠지라는 생각에 근처 식당에서 짧게 일했어요. 일이 고되기는 했지만, 학교에 가고 센터에 가 있는 시간이랑 잘 맞아서 시간이 될 때마다 나갔죠. 센터에 다니면서 아이가 크게 나아지거나 하는 건 느낄 수 없었어요.
다만 제가 이 증상에 대해 더 잘 이해하게 되었고 몰랐던 제 아들을 더 많이 이해하게 되었죠. 일하며 고된 와중에도 아이의 장애를 이해하기 위해서 밤낮으로 공부하고 아이한테 도움이 된다고 하면, 무엇이든 해주고 싶었어요.
첫 달은 그래도 약속대로 양육비를 보내주더군요. 둘째 달은 좀 늦게 보내더니, 셋째 달부터는 금액이 줄어들고 전화로 재촉했을 때야 겨우 보내주었어요.
그리고 네 번째 달부터는 아예 연락도 안 받더군요. 어머니께도 연락해 봤지만 연락받지 않았어요. 혹시 이럴까 싶기는 했지만, 역시나 당장 아이 센터 비용을 내려면 일을 더 늘릴 수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아이를 어디에 맡겨야 할지 고민이었죠. 친정 식구도 없고 친척이나 친구도 이렇다 할 사람이 없었어요. 그리고 평범한 아이가 아니기 때문에 저는 식당 사장이 소개해 준 한 술집의 주방에서 야간에 일하게 됐어요.
야간이라 급여도 더 쎄고 아이가 자는 동안 다녀오면 되겠다. 싶었거든요. 그렇게 며칠을 아이가 잠든 밤 나갔었고 이렇게 해나가면 되겠다. 싶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일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아이가 깨어있었어요.
” 아들~ 엄마 왔어~ 일어나 있네? “
저는 여전히 대답도 눈도 마주치지 않는 아이의 옆에 다가갔다가 깜짝 놀랐죠. 아이 이마에서 피가 나고 있었어요. 이게 무슨 일이야 한 책을 보니 모서리에 피가 묻어있었어요. 책을 좋아했던 아들은 제가 나간 사이에 눈을 떴다가 책장 위쪽에 있는 책을 꺼내려다가 그만 책들이 얼굴로 쏟아지면서 모서리에 이마를 다친 것 같더라고요.
” 아들 미안해 엄마가 자리를 비워서…”
저는 다친 아이의 이마를 매만지며 한참을 울었어요. 이마에서 피가 나는데 아이가 울었을까? 아팠을까? 아프다고 느꼈을까? 어떻게 반응했을지도 알 수 없고 또 언제 아이가 어디서 어디를 다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생겼습니다.
어쩔 수 없이 술집의 사장에게 혹시 일하는 동안 뒷방의 아이를 재워도 되는지 양해를 구했어요. 사장은 평소 제가 일을 잘한다며 칭찬하며 좋게 봐주었기에 흔쾌히 그러라고 하더군요.
그렇게 저는 저녁이 되면 출근해 아이를 뒷방에 재우고 밤새 식당에서 일했습니다. 평소 워낙 조용한 아이인데다 책만 쥐어주면 뛰거나 시끄럽게 하는 일이 없으니 직원들도 신기해했어요. 그런데 일이 터졌어요.
” 얘가 왜 이래!! “
평소 아이를 귀여워하던 아가씨가 그날도 책을 읽고 있는 아이가 신기해서 장난친다며 손에서 책을 뺏었나 봐요. 하지만 그런 장난을 이해할 수 없었기에 아이는 개성을 질렀고 마침 아이 옆에서 가까이 앉아있어 머리카락을 손으로 움켜쥐며 소리를 질렀나 봅니다. 아이가 지르는 괴성에 깜짝 놀라 직원들과 근처 손님들이 우르르 달려갔어요.
” 아들 왜 그래! “
대답할 리 없는 아들은 계속해서 개성을 지르며 아가씨의 머리를 움켜쥐고 머리를 주먹으로 때리려 했습니다. 저는 겨우겨우 아이를 떼놓았고 아이는 여전히 소리를 질렀죠. 아들 진정 좀 해봐 제발 저는 울며 애원했어요.
그때 옆에 던져진 책이 눈에 띄었고 저는 얼른 책을 집어 다시 아이에게 지어 주었습니다. 마치 태풍이 지나간 다음날처럼 아이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다시 조용히 책을 펼치며 앉았어요.
” 허… 뭐야? 아줌마 아들 뭐예요? 또라이야? “
” 그런 게 아니라, 저희 애가….”
” 이거 머리 빠진 거 어떡할 거야. 어떡할 거냐고!!”
” 죄송합니다….”
사이 몰려든 사람들은 사장님이 돌려보냈고 저에게 무슨 일이냐고 따져 물었습니다.
” 아니, 사장님 저는 그냥 애가 귀여워서 책을 잠깐 뺏은 건데 “
” 죄송합니다. 저희 아이가 자폐증이 있어서 그래서 그런 걸 잘 이해 못 해요.”
” 근데 평소에는 엄청 조용한 자폐 정신병자를 지금 가게에 데려왔다는 거야? “
” 아니 자폐는 정신병이 아니라요…”
” 됐고 뒷말할 것 없고 앞으로 아이 데리고 오지마! “
” 사장님 앞으로 이럴 일 없을 거예요. 아이 혼자 집에 둘 수가 없어요. “
” 제발! 방금도 손님들 다 난리난 거 안 보여? 아줌마 때문에 가게 이미지 망치면 책임질 거야? “
” 진짜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예요. 사장님…”
” 애 데리고 오지 말든지 아니면 이제 나오지 마! “
다시 한번 세상의 벽을 느꼈습니다. 저는 당장 다른 일을 구하기가 힘들고 아이를 데리고 또 어디서 일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우리 애가 먼저 잘못한 것도 아닌데 비난은 결국 저희 아들 몫이라니 아들 다들 미안해 엄마가 능력이 없어서 미안해 돈이라도 넉넉했으면 우리 아들 이런 고생도 안 시키고 센터도 계속 다니고 했을 텐데 우리 아들 좋아하는 책도 잔뜩 사주고 미안해 아들 엄마가 미안해 저는 책의 시선을 고정한 아이를 붙들고 울었습니다.
이렇게 계속 살 수 있나 이게 맞는 일일까? 어쩌면 내가 아이를 더 힘들게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며칠 뒤 저는 아이 손을 잡고 근처 보육원에 갔습니다. 짐이랄 것도 없는 간소한 가방을 들고 보육원 문 앞에 섰죠.
“아들 여기 무척 좋은 곳이래 선생님들도 있고 친구들도 있고 아들 좋아하는 책도 있어 “
저는 어디인지 모를 곳을 응시하고 있는 아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습니다. 쪼그려 앉아 아들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어요.
” 엄마가 얼른 일하고 돈 벌어서 올게 그때까지만 여기 있자~ 엄마가 얼른 돈 벌어서…”
여전히 제 눈도 보고 있지 않은 아이의 눈을 바라보니 또다시 눈물이 났습니다. 고개를 숙이며 울고 있는데, 갑자기 아이가 제 머리를 만지더군요. 다시 아이를 올려다보았습니다. 아이는 작은 손으로 제 볼을 만졌어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아니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순간 처음으로 아이가 먼저 저에게 다가온 것 같았어요.
” 미안해… 엄마가 미안해…”
저는 아이를 보욱원에 맡기려고 했던 것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애 아빠랑 시어머니에게 그렇게 큰소리치더니, 결국 역시 이런 선택을 하려던 게 부끄러웠어요.
그래 여기서 무너지면 안 돼… 분명 아이도 돌보며 일할 수 있는 곳을 찾을 수 있을 거야. 저는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아이의 손을 잡고 보육원을 등졌습니다. 그런데 그때 뒤에서 한 여성의 목소리가 저를 불렀습니다.
” 아기 엄마!! “
” 네? 저요?
” 왜 안 들어오고 그냥 가요? “
60대쯤으로 보이는 한 중년 여성이었어요. 그분은 저에게 자초지종을 물었고 저는 처음 만났지만 저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는 사람도 처음이라 그동안의 일들을 줄줄이 이야기했어요. 한참을 듣던 그분이 아이를 한번 쳐다보더니, 제게 말했습니다.
” 애가 책을 좋아하는데 그럼 책은 사주고 있어요?”
” 아니요. 헌책방에서 몇 권 사고 아이가 똑같은 책을 몇 번이나 또 읽어요. 책값도 워낙 비싸서 자주 사주기가 힘들더라고요.”
” 잠깐 있어봐요. “
그렇게 말씀하시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통화를 마치더니, 저에게 주소 하나를 알려주시더라고요.
” 여기 내가 아는 곳인데, 마침 최근에 사람을 구한다더라고. 중고 책방이라 잘하면 책도 몇 권 얻을 수 있고 일하다 보면, 저렴하게 살 기회도 있을 거야. 여기 근처에 공부방도 있어서 아이는 일하는 동안 거기 맡겨두면 될 거예요. “
” 감사합니다. 선생님…”
저는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어리둥절했어요.
” 감사합니다. 이런 도움을 받아도 될지…”
” 그럼 받아도 되지~ 대신 아기 엄마도 남을 도울 일이 생기면 언제든 돕겠다고 약속해요. 세상은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조금씩 나아지는 거니까 “
” 네.. 이 은혜 정말 잊지 않겠습니다. 성함이라도…”
” 허허! 성함은 됐고 어차피 또 만날 기회가 있을 거예요. 그건 그때 가서 갚기로 하고 잠깐 있어봐요. “
그분은 잠시 보육원 안으로 가시더니, 잠시 후 통과 봉투를 들고 나왔습니다.
“내가 다른 건 더 줄 건 없고 이건 내가 만든 김치인데 다들 맛이 좋다고 하더라고. 이거 가져가서 애기랑 같이 먹어요. 내가 녀석이 장난감을 좋아했다면 이렇게 마음쓰지 않았을 텐데 아들이 아주 기특하게도 책을 좋아해서 예뻐서 주는 거니까 받아요.
그리고 이건 보육원에서 애들이 안 읽는 책 몇 권 가져왔어요. 여기는 어차피 기부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이 정도는 줘도 되는 거니까 부담 갖지 말아요. “
”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감사합니다. 저희 아이 잘 키워서 꼭꼭 약속드린 것처럼 도움이 필요한 분은 언제든 도울게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다 무너지고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저는 귀인을 만났습니다. 아이와 더 이상 함께 하지 못할 뻔했던 순간 저를 다시 살아가게 할 도움을 준 너무 감사한 분이었어요.
다음날 저는 서점으로 찾아갔습니다. 어서 오세요. 어제 전화받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 책방에서 일해본 적은 있어요? “
” 예전에 결혼하기 전에 동네 서점에서 일한 적이 있었어요. “
” 그럼 뭐 잘 아시겠네요. 대신 저희는 헌책방이라서 책 중에 많이 닳고 약해진 것들도 있거든요. 그런 걸 옮길 때 주의해 주세요. 자 매장 안에 설명 먼저 해 줄게요 이리로 오세요. “
매장의 사장님은 매우 친절한 분이었고 가게는 좀 넓긴 했지만, 그래도 식당 일에 비하면 훨씬 여건이 좋았습니다. 아이 역시 그분께서 말씀하셨던 근처 공부방에 부탁드릴 수 있었어요.
” 어제 할머니가 말씀하신 분이구나~ 제가 예전에 특수 아동 전공을 했어서 걱정 말고 일하고 오세요. 어머니 “
이게 꿈인가 진짜인가 어리둥절한 만큼 모든 게 저를 위한 선물 같았습니다. 저는 감사한 마음을 갖기 위해서 더 열심히 일했고 사장님은 가끔 판매할 정도의 가치가 없는 낡은 책이나 아니면 오랜 기간 팔리지 않은 책들을 선물로 주셨어요.
특히 같은 책이 여러 권 들어온 것들도 주셨는데 당시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던 지식사전이나 참고서 같은 책들이 많았습니다. 원해서 우르르 샀다가 자라면서 다시 우르르 들어오게 되는 것이죠.
저희 아들의 연령에 맞지는 않았지만 워낙 책이라면 다 잘 보는 아이라서 저는 때로는 중학생 참고 도서를 또 때로는 교수님들이 쓰신 논문 같은 어려운 도서들까지 아이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근데 언젠가부터 아이가 조금 특별하다고 느끼기 시작했어요.
” 호랑이 36 , 자동차 112 “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가 했습니다. 종종 사물이나 간판, 곤충 등 주변의 것을 가리키며 숫자와 알 수 없는 단어들을 이야기했어요.
그러다 하루는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는데 어떤 건물이 나오더라고요. 아이는 갑자기 그것을 가리키더니,
” 24 프랑스 “
” 24?”
저는 순간적으로 책장에 꽂혀있는 책에 눈이 갔습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책장에서 프랑스라고 적혀있는 책을 꺼내 24 쪽을 열어보았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어요.
정확히 페이지에 아이가 가리켰던 건물의 사진과 설명이 나와 있었거든요.
” 24 프랑스, 1856년 프랑스. 1856년 95미터 창문 16개 “
아이는 책 속에 나와 있는 건물의 설명들을 줄줄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나 책의 설명에도 나오지 않은 사진으로 봤을 때 창문의 개수라던가 사람의 숫자 등등 숫자에 관련된 것을 위주로 이야기했어요.
저는 혹시나 아이가 숫자에 애착이 있는 것은 아닐까 싶어 아이에게 숫자를 이용해서 대화를 해 보았습니다.
” 준호야 이거 과자 두 개 “
” 과자 두 개 , 3번 칸 8개 8개 두 개 16개 “
아이는 과자가 있던 서랍장의 위치를 3번 칸이라고 표현했어요. 그리고 과자에 올려진 초콜릿의 개수와 그것을 더한 숫자까지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이것을 알아듣는다고 생각했는지 아이는 종종 저에게 숫자로 말을 걸었습니다.
“2번 , 2번 칸, 2번 칸 세 번째 “
저는 그때부터 아이가 숫자에 관심이 크다는 것을 인지하고 헌 책방에서도 숫자로 관련된 책들을 더 많이 가져다주기 시작했어요. 아이가 읽은 책 중 아무 장이나 펼쳐 물어보면 아이는 페이지의 모든 내용을 줄줄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천재성도 아이의 특별함 때문에 다른 이들에게는 그저 더 이상해 보이는 모습이었죠. 초등학교 내내 아이는 걸핏하면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했고 학교에 가서 애들을 달래보고 혼내보아도 은근한 괴롭힘과 따돌림은 계속되었습니다.
하지만 단단한 자신만의 세상에 사는 아이는 그런 괴롭힘도 신경 쓰지 않았어요. 그렇게 힘들었지만 초등학교를 졸업했고 중학교 입학하니 대놓고 괴롭히는 아이들 없었지만 여전히 은근한 따돌림은 계속되었죠.
주변에 특수학교가 없었기에 저는 아이를 일반 중학교에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이 바뀔 때마다 같은 반 부모님들의 원성도 만만치 않았어요. 학교에 저희 아이와 같은 반은 피해달라고 전화하는 학부모님들도 있었죠.
그러던 어느 날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저는 또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다급하게 뛰어갔어요. 교실로 와달라는 담임 선생님의 이야기에 교실 문을 열었더니, 아이가 너무나 편안한 얼굴로 담임 선생님과 앉아 있었습니다.
” 어머니 오셨어요. “
” 선생님 무슨 일로…”
” 아이구 뛰어오셨어요? 제가 연락드려서 너무 놀라셨죠 그러려던 건 아니었는데 잠깐 앉아 계세요. 마실 것 좀 드릴게요. “
선생님은 냉장고에서 커피를 꺼내 저에게 내밀었습니다.
” 죄송해요. 근데 전화로 말씀드리기가 좀 어려워서 “
” 아니에요. 혹시 저희 애가 또 무슨 사고라도? “
” 사고라면 사고죠 대형사고! “
호탕하게 웃는 선생님 앞에서 저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지었습니다.
” 어머니 혹시 서번트 증후군이라고 아세요? “
” 서번트 증후군이요? “
” 자폐증 증상 중 하나인데 특정 영역의 천재적인 능력이 나타나는 아이들을 말해요. 그런데 그게 준호 아무래도 서번트 증후군인 것 같아요. 저도 전문가가 아니라서 좀 더 알아봐야겠지만, 준호가 혹시 수학에 재능 있는 거 알고 계셨어요?”
선생님은 프리닝 노트 한 장을 저에게 내밀었어요.
” 숫자를 좋아하는 건 알았지만 수학의 재능까지는…”
” 지금 이 문제 대학 수학 문제예요. 혹시 몰라서 줘 봤는데 준호가 이걸 풀었더라고요. “
” 네? “
” 우연인가 싶어서 다른 문제들도 몇 개 줬는데 그것도 다 풀더라고요. “
” 준호가 대학 수업을요? “
” 네 맨날 수업시간에 교실에도 안 있으려고 하고 자꾸 밖에 나가길래 제가 주의 깊게 좀 살펴봤었거든요. 근데 주로 도서관에 있더라고요. 그러더니, 어느 날은 혼자서 학교 운동장에 나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따라가 봤더니, 운동장 흙바닥에 수학 문제를 풀고 있었어요. “
그게 신기했던 선생님은 마치 본인이 수학 전공이었기에 중학생 수준부터 고등학생 대학생 순으로 아이에게 문제들을 줬다고 해요. 그런데 아이가 막힘없이 무슨 문제든 척척 풀어냈다는군요.
사실 수학적으로 제가 영 아는 게 없어서 그냥 자폐증 아이들이 저는 한 가지에 관심을 보인다길래 그게 그저 숫자를 좋아하는 것인 줄 알았어요. 제가 수학 문제를 풀라고 줘 본 적도 없고 아이가 풀었다고 해도 그게 맞는지도 잘 몰랐던 거죠.
” 그래서 말인데… 친구 중에 지금 고등학교에서 물리를 가르치는 친구가 있어요. 그런데 친구가 어릴 때부터 수학 영재로 유명했던 친구거든요. 지금은 수학 영재들 육성하는 기관의 담당 교사로 있어서 혹시 친구에게 연락해서 준호를 상담받아보면 어떨까 싶어서요 “
” 하지만 준호는…”
” 네 알아요. 자폐증인 거 사실 저의 남동생도 자폐증이거든요. 그래서 학기 초부터 준호를 좀 유심히 지켜봤던 것도 있어요. 아이들 사이 벌어지는 일인데다 이제 머리도 굵어진 녀석들이라 제가 직접 나서서 너네 친하게 지내라 할 수는 없어서 그저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었는데 저희 동생도 자폐지만 지금은 가게에서 일도 하고, 결혼도 했어요. 어머니 그러니까 자폐증인 걸 생각하시기 전에 준호한테 있는 재능이 어떤 건지 한번 테스트라도 받아보세요.”
저는 잠시 망설였지만 아이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면 키워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선생님이 말씀하신 수학영재센터로 방문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어머니 한기춘입니다. 지금 과학고에서 물리를 가르치고 있고 여기 영재센터에서 아이들을 지원하고 있어요. “
” 안녕 니가 준호니? “
시원한 인상에 그는 준호의 자폐증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 하하 어머니 여기 있는 애들 준호랑 비슷한 애들도 많아요. 문제 하나에 꽂혀서 밥도 안 먹고 친구들이랑 이야기도 안 하고 온종일 문제만 풀려고 붙들고 있고 게임을 하는 친구들도 그렇잖아요 애들 게임을 한다고 부모가 불러도 대답도 안 하고 빠져들다가 학원도 땡땡이 치고 저는 뭐 하나가 좋아서 그것만 파고드는 친구들이랑 준호랑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
고맙게도 그렇게 말해준 사람은 한 선생님이 처음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아이를 데리고 상담실로 가서 여러 단계의 수학 문제를 풀어보게 했어요. 테스트 시간이 끝나고 선생님이 안쪽으로 저희를 불렀습니다.
” 어머니 지금 이 테스트지가 저희 센터에 입소 원하는 친구들이 보는 시험지거든요. 그리고 이거 여기 센터 다니는 친구들이 분기별로 보는 시험지 중 하나고요. 준호는 이걸 다 풀었네요. “
그리고 선생님은 잠시 말을 멈추고 물끄러미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 그리고 이거 다 맞았어요. 어머니 준호는 영재예요. 수학 영재! 본인이 아직 배우지 못한 부분이 있어서 조금 더 어렵게 푼 문제들도 있지만 지금 수준으로는 대학에 다녀도 손색이 없을 정도예요. 혹시 준호 과학고 진학은 어떠세요? 당장 대학에 가도 손색없지만, 아직 배우지 못한 기초공식 같은 건 더 배워야 하니까 저는 어떨까 하는데 “
” 과학고요? 저희 준호가 과학고를요…?”
” 지금 제가 일하는 학교는 사립인데 재능 있는 친구들을 양성하는데 장학금도 지원하고 있어서 학교 다니는 데 따로 돈이 들진 않을 거예요. 준호 정말 아까운 재능을 가졌어요. 여기서 더 발전하면 앞으로 어떤 미래가 있을지 몰라요. 어머니 돈 걱정은 마시고 제발 진지하게 고려해 보세요. “
저는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과학고 당장 학비는 안 든다고 해도 다니는 친구들의 수준도 높고 또 공부 잘하는 친구들이 오면 부모님들은 더 유난일지도 모르는데 그럼 거기서마저 우리 아이를 배척하면 아이는 또 어디로 가야하나 하지만 이대로 재능 있는 아이를 날개도 펼쳐보지 못한 채 날지 못하게 말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 결과가 어떻게 되든 일단 부딪쳐보자 저는 다음날 선생님에게 아이를 과학고에 보내겠다는 전화를 드렸습니다. 담임 선생님은 매우 기뻐하셨어요.
수학 선생님이자 담임 선생님인 진빛나리 선생님과 아이가 입학할 고등학교 물리 교사이자 수학영재센터에서 아이들을 봐주는 한기춘 선생님의 응원과 힘을 모아 아이는 장학금을 받으며 과학고에 입학했습니다.
그리고 걱정했던 마음과 달리 선생님들께서 입학 전 부모님들에게 저희 아이에 대한 설명을 매우 친절하게 해주셨고 담임 선생님과 다른 교사분들과 상의해 저희 아이가 최대한 편안한 환경에서 학습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그 모든 순간 하나하나 노력 하나하나가 저희에게는 얼마나 감사한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장학금으로 학비를 내고 있다고 해도 틈틈이 연수 비용이나 수학 경시대회 참여를 위해 차비 등등 돈이 들어갈 곳들이 아예 없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처음으로 저희 아들이 대학에 갈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저는 더욱 열심히 일해 알뜰히 돈을 모았습니다. 아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를 공부하고 또 자기 말을 잘 이해해주는 사람들과 함께 해서인지 이전보다 더 편안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고3 여름방학을 앞두고 선생님께서 저에게 해외 유학에 대해 권유하셨어요.
” 어머니 준호는 지금 수학 천재라고 할 수 있어요. 또 수학을 잘하다 보니 물리 분야에서도 뛰어난 성적을 내고 있구요. 어쩌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물리학자가 될 수도 있어요. 준호가 얼마 전 풀이한 물리 문제를 하버드 대회 교수로 일하고 있는 친구한테 보냈더니, 관심을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말인데 혹시 미국 대학 진학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
” 미국이요? 하지만 준호는 영어도 못하는데… “
” 우리 학교에서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도 있는데, 준호가 영어를 이해를 못 하는 것 같진 않아요. 다만 원래도 말이 잘 없기 때문에 표현은 안 하는 것 같긴 해요. 근데 수학이나 물리 같은 건 공식과 풀이로 설명할 수 있는 거라 언어적인 건 당장은 문제가 되지 않을 거예요.”
” 하지만 제가 그럴 형편이 되지 못해요. 지금은 어떻게 생활비 정도를 벌고 있지만 미국 유학은 더 큰돈이 들 텐데…”
” 우선 장학금을 받을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해 볼게요. 미국 대학은 워낙 다양한 장학금 제도가 있어서 받을 수 있는 분야가 있을 거예요. 그리고 다른 곳에서 장학 지원을 받을 수 있는지 빛나리 선생님이랑도 한번 알아볼게요 그러니까 어머님께서는 미국에 보낼 의사가 있으신지 그것만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해 주세요. “
저는 알겠다고 대답을 한 다음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통장 잔고를 보았어요. 많이 모았지만 대학 학비 이외에 미국에서 생활할 생활비까지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그리고 아이의 자폐증 때문에 먼 타지에 혼자 보낼 수도 저도 같이 미국으로 가야 하는데 이 돈으로는 절대 무리였어요.
아이의 방으로 가 그동안 아이가 받아온 상을 보았습니다. 각종 수학 경시대회 우수상부터 어려운 물리 문제를 풀어서 받았던 인증서 이렇게 우수한 재능의 아이인데 더 이상 지원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현실이 막막했습니다.
그해 가을 선생님의 노력 덕분에 아이는 전액 장학금 지원을 조건으로 세계 명문의 하버드대에 합격했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어요.
유치원도 초중학교도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자폐증으로 손가락질 받고 따돌림당하던 우리 아들이 하버드라니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학에 우리 아이가 합격하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고 분명 기쁜 일이었지만 저는 미국에서 지낼 생활비를 떠올리며 다시 현실의 문 앞에 부딪쳤습니다.
대학 등록금 이외에 아이가 미국에서 생활할 비용들을 계산해 보았어요. 거기에 제 생활비와 영어도 못하는 제가 그곳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일을 한다면, 얼마 정도를 벌 수 있을지 등등을 아무리 계산해 보아도 답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고심 끝에 저는 선생님을 찾아가 이야기했습니다.
” 선생님 너무너무 감사하고 기쁘지만 준호 하버드대는 포기해야 할 것 같아요.”
” 아니 어머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
” 등록금은 어떻게 장학금으로 받는다쳐도 준호 혼자 미국에 보낼 수도 없고 저도 같이 가야 하는데 저희 두 사람에게 들어갈 비용이랑 제가 가서 일을 구할 수 있을지도 문제고 열심히 돈은 모았지만 그럴 정도는 아니에요. 그냥 국내 대학 원서로 다시 준비해야 할 것 같아요. “
” 어머니 그러지 말고 잠시만 기다리시면…”
저는 그대로 상담실을 뛰어나왔습니다. 재능 있는 아이와 능력 없는 엄마의 탓에 재능을 갉아먹어야 하는 현실 저는 현실 앞에서 다시 한번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리고 학교 입구를 뛰어가다 울고 있는 그때 한 여성이 말을 걸었어요.
” 아니, 애기 엄마 볼 때마다 울고 있으면 어떡해? “
저는 고개를 들어 말을 건 사람을 보았습니다. 저희 아이가 어린 시절 보육원 앞에서 제게 도움을 주었던 바로 그분이었어요.
“선생님은…?”
” 또 울고 있는 거야? 왜 또 돈이 속 썩여? “
” 어머니!!!! “
뒤를 돌아보니 한기춘 선생님이 저를 따라 뛰어왔더군요. 두 분 만나셨네요. 네 어머니 오늘 어머니 오신다길래 제가 모신 분이에요. 대표님 안녕하셨어요.
” 허허 오늘 만나게 해준다는 학생 어머니가 이 애기 엄마였어?!”
” 두 분 아는 사이예요? “
” 뭐 예전에 김치 좀 먹인 사이랄까? “
이제는 흰머리의 70대가 된 할머니께서 저를 보시더니, 물끄러미 미소 지었어요.
” 어머니 다시 상담실로 가서 이야기 좀 들어보세요. “
저는 선생님 그리고 할머님과 함께 상담실로 갔습니다.
” 이쪽은 유명 김치 회사 대표이신 나이순 대표님이에요. 우리 학교 장학재단 운영 중이신데, 준호 장학금 심의도 나 대표님이 승인하신 거였어요. “
“하하 그렇게 책을 좋아하더니, 아주 책을 달달 외워버린다던데 그때 천재인 줄 알았으면 김치도 더 줄 걸 그랬어! “
” 아니에요. 그때 도움 주신 덕분에 지금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거예요. 그때 은혜는 정말 잊지 않고 있어요. “
” 그래 그랬다고 하더라고. 보육원에 가끔 기부금을 보낸다며? “
” 그걸 어떻게…? “
” 우리 회사에서 지원하는 곳이니까. 잘 알지~ 여기 학교에도 우리 보육원 출신 친구들이 몇 있거든? 내가 어릴 때 우리 집이 가난하다고 초등학교도 못 나왔어요.
우리 오빠만 학교에 다니고 그게 늘 얼마나 세미나고 부러웠는지 몰라~ 그렇게 어릴 때부터 부잣집 식모에 식당 일을 하다가 어느 날 반찬 가게를 차렸는데 다들 내 김치가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르겠다대? “
대표님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내려놓더니, 말을 이었습니다.
” 마침 여기 이 한기춘 선생 부모님이 우리 집 단골이었는데. 글쎄 내 김치가 너무 맛있다고 이걸 사업을 해보자고 하는 거 아니겠어? 그래서 뭐 지금은 김치 하나 잘 만들어서 대표님 소리도 듣고 떼돈 벌었지 뭐~
내가 공부에 한이 있어서 이후로 한 선생이랑 같이 공부 잘하는데 돈 없어서 못한다는 애들 뒷바라지도 하고 있고 그렇지 뭐~ 이번에 아들 하버드에 붙었다며? “
“네…근데 …”
” 뭘 근데야! 하버드인데 포기한다고? 뭣 땜에? 돈 땜에? 남들은 들어가고 싶어도 마음대로 못 가는 곳인데 이렇게 포기하면 너무 아깝지 않아?”
” 어머니 나 대표님이 대학 졸업할 때까지 생활비를 지원해 주신대요. 오늘 이 말씀 드리려고 모셨던건데…”
“그러게 한국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그냥 뛰어나가 버리면 어떡하나? 공짜로 해주겠다는 건 아니고, 요즘 한류도 뭐다 김치가 건강에 좋다. 어쩐다 해서 미국에 납품하고 있는데 타지에서 성실한 직원 찾는 게 쉬운 일이 아니야. 그래서 거기 공장에서 일도 좀 해주고 대신 나는 자네랑 준호가 공부 마칠 때까지 부족함 없이 지원하겠네~ 어떤가? “
저는 또 그만 눈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 감사합니다. 이렇게 또 도움을…. 감사합니다. “
저는 연신 고개를 숙여 감사하다는 이야기만 반복했습니다. 그해 겨울 저는 아이와 함께 미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미국 생활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학교에서는 아이를 위해 편안한 환경을 제공하고 특수교사와 함께 주에 1회씩 상담도 진행했어요. 공
장에서의 일도 어렵지 않았고 공장에서 운영하는 직영 한인 식당에서도 일하며 저도 준호만큼 열심히 생활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는 학교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나타내 자폐증의 외국인이지만 학교 상위권을 늘 섭렵했습니다.
저희 아이에게 친절하게 대하던 친구가 있었는데, 학교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는 두 사람이 과제로 진행한 프로젝트가 한 기업의 눈에 띄게 되었어요. 그 덕에 아이들은 해당 기업에 함께 취직하게 되었고 이후 두 사람이 함께 개발한 컴퓨터 프로그램이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았고 두 사람은 기업의 투자를 받아 자신들만의 회사를 창업했습니다.
이야기는 한인 사회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크게 다뤄졌어요. 한국인 자폐소년 의학 전자동화 시스템에 한 발을 내딧다 연신 뉴스에 관심을 받고 한국에서도 이 소식은 널리 퍼졌습니다.
여전히 무한한 도움과 응원을 주던 선생님들과 대표님이 축하한다는 전화를 전했어요. 그리고 한국 방송을 보던 중 한 인터뷰를 보게 되었습니다.
준호와 친구의 회사는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어 준호의 친구도 너무 좋은 아이라 늘 옆에서 저희 애를 잘 챙겨주고 제 안부까지 잘 물어봐주었어요.
두 사람은 어린 나이에 큰 성공과 부를 누리게 되었죠. 역시 김치 공장과 한인 식당이 잘 되어서 이제는 돈 걱정 없이 지내고 있었고요.
” 준호야 혹시 장학재단을 만들면 어떨까? “
” 장학재단? “
” 응 준호도 예전에 공부하고 싶은데 돈 없었을 때 장학금으로 공부했잖아. 이제 우리가 돈이 있으니까. 이번에는 우리가 다른 친구들을 도와주면 어떨까 해서~”
” 좋아! 할머니랑 선생님처럼 나도 좋은 일 하는 거 좋아! 공부하고 싶은 사람 있으면 마음껏 공부해야 돼. 나처럼 “
” 아이구 우리 예쁜 아들 진짜 다 컸네~ 이제 그럼 할머니랑 선생님들 이름 한 글자씩 해서 만들면 어때 이름 응 나이순 할머니 진빈나리 선생님 한기춘 선생님 이름을 따서 한빈나 어때? “
” 좋아! 한빈나 좋아! 좋은 이름이야 “
저는 이 소식을 할머님 저희한테 드렸습니다. 대표님과 선생님들에게 알렸어요. 세 분 모두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냐며 매우 기뻐했죠.
그리고 장학재단이 설립되던 날 세 분을 미국으로 초청해 다 함께 미국 곳곳을 여행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지금 아들은 방에서 장학재단에서 후원 중인 한 친구의 수학 문제를 봐주고 있어요. 설명을 친절하게 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기가 아는 한에서 꼼꼼하게 풀이를 봐주고 코멘트를 달아주고 있네요.
처음 자폐증이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고, 소에 키우면서는 아이를 보6원에 보내려던 생각까지 했죠. 쉽지 않은 삶이었고 사연에 다 담지 못한 우여곡절도 정말 많았지만 사랑하는 아들과 그리고 좋은 인연들이 함께해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또 지금은 제가 받은 도움을 남들에게 돌려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죠. 삶에 있어 장애가 걸림돌이 될 수 있어요. 장애가 없는 사람들보다 몇 배는 더 힘들고 괴로울 수 있죠. 하지만 그래도 장애가 여러분들의 삶을 포기하게 만들도록 놔두지 말아요. 언제나 길을 열려 있고 길을 가다보면 어떤 기회를 마주칠지 모르니까요.긴 사연 들어준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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