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형편에도 오갈데없는 시모를 모셔왔는데…” 내 눈치를 보며 집 밖을 배회하는 시어머니, 어느날 경비아저씨의 ‘한마디’에 난 주저앉아 눈물을 펑펑 흘리고 말았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다니는 아들을 키우고 있는 40대 여자입니다. 결혼 후 지금까지 많은 일들이 있었고, 여러 번의 힘든 시간도 있었지만 그래도 가족끼리 서로 의지하며 잘 견디고 살았던 것 같아요.

우리 친정도 가진 거 별로 없고 시댁도 비슷한 상황에서 우리 두 사람은 그야말로 맨손으로 결혼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11년 전, 저희가 결혼할 당시에 남편이랑 제가 모은 돈을 합쳤더니 겨우 5000만원 정도 모였는데 그때는 은행에서 대출받을 상황도 아니라 보증금 3000에 월세 45만 원짜리 빌라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했어요.

여유가 없었던 만큼 남편이랑 더욱 허리띠 졸라매며 살았었죠. 그 덕분에 지금은 부부 명의로 된 아파트도 한 채 있을 정도로 남부럽지 않게 지내고 있어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제대로 쉬어본 기억이 없을 정도인데 우리 아들 태어났을 때도 출산 후 딱 3개월 쉬고 다시 회사에 복직해서 일을 했습니다.

저도 모성애가 강한 편이라 최소한 아이가 돌 지날 때까지는 옆에 있어 주고 싶었는데, 지긋지긋하게 대를 이어가는 가난을 끊고 싶었기에 오히려 더 이를 악물고 출근해서 일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이 과정에서 저희 시어머니가 헌신적으로 도움을 주셨습니다. 남편이 집안의 막내였는데 위로 형과 누나가 하나씩 더 있었기 때문에 결혼할 때 말 그대로 시댁 도움을 아무것도 받지 못했습니다.

안 그래도 없는 집안 형편이라서 장남 결혼할 때도 시부모님이 모으고 모아 겨우 만든 2000만 원으로 월세 보증금 보태는 것이 고작이었으니까요.

그런 집안 사정을 다 알았기 때문에 한 번도 가난한 시부모님을 원망해 본 적 없었고 오히려 저희가 더 열심히 살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지난 11년 동안 맞벌이하며 적금 붓고 살다 보니 지금은 시댁  삼 남매들 중에 저희 집이 가장 멀쩡하게 잘 살고 있더라고요.

아주버님은 몇 년 전 멀쩡히 다니던 직장 때려치우고 장사를 해야겠다며 전 재산 투자의 고깃집을 차렸다가 전부 말아먹고 이혼당해서 현재는 혼자 살고 있어요.

집안 장남으로서 잘 풀리지 않았다는 부담감 때문인지 명절에도 얼굴 한번 보기 힘들 정도로 다른 식구들을 피해 다닙니다.

남편한테 들은 이야기로는 지방 작은 도시에서 혼자 원룸에 살며 공장이나 공사 현장 같은 일을 하며 근근이 먹고 산다고 들었어요.

시부모님이 아주버님께 같이 살자고 하셨지만, 차마 부모님 댁에 얹혀 살진 못하고 혼자 그러고 지낸다 하더라고요.

그리고 집안의 둘째인 시누는 결혼 전에는 대학병원 간호사를 하며 나름대로 잘 풀리는 듯하였지만 결혼하고 나서 인생이 조금 꼬이기 시작했어요.

어디라고 차마 말은 못 하겠는데 결혼하고 나니까  이상한 사이비 종교에 빠져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시누는 물론이고 그때 온 집안이 풍비박산 날 뻔했습니다.

지금은 다행스럽게도 저희 시누가 사람과의 관계를 모두 정리하고 4년 전에 재혼하여 늦둥이 낳고 잘 살고 있어요.  이제 두 돌 지난 아이 키우며 바쁘게 살고 있는 시누라 본인 식구를 챙기기에도 정신없을 거예요.

첫째 아주버님과 둘째인 시누이  사정이 이런 식이라 그간 시부모님 챙기는 것은 오롯이 저희 부부의 몫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집안에 제가 시집왔을 때부터 아버님은 일을 못하시는 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없는 살림에서도 시부모 용돈은 열심히 챙겨드렸어요.

만약 시어머니가 저를 괴롭히거나 시집살이시키려고 했다면, 돈 한 푼이 아쉬운 우리 집안 형편의 시부모 용돈은 어림도 없었겠지만, 어머님이 정말 제게 잘해 주셨고 그래서 더 외면하기 힘들었어요.

제가 아이 낳자마자 석 달 만에 몸 풀고 회사로 복직하는 데 있어서 다른 누구보다도 시어머니의 희생이 정말 컸다고 생각합니다.

시댁은 저희 집에서 버스를 타고 한 시간 반 정도 떨어져 있는 시골에 살고 있었는데, 매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시어머님이 저희 집에서 대신 애를 봐주셨어요.

물론, 저도 공짜로 애 봐달라 부탁을 드린 건 아니고, 왕복 차비는 빼고 매달 80만 원씩 용돈을 드렸었는데 마음 같아서는 더 많이 드리고 싶었지만 저희 살림도 빠듯해서 더는 무리를 할 수가 없었죠.

시어머님이 매주 월요일 저희 집에 올라오셔서 금요일 저녁에 시댁으로 돌아가는 생활을 거의 2년 정도 하셨고 덕분에 가장 힘든 시기를 비교적 수월하게 넘길 수 있었습니다.

저희가 그리 잘 산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이 정도라도 평범하게 살 수 있는 건 시어머니 덕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어요.

그런데 작년 초에 시아버님이 암으로 돌아가시고 이후, 시골에 혼자 남아 살게 된 어머님이 자꾸 마음에 걸리더라고요.

저희 시어머니도 이제는 80살이 가까운 나이인데 그런 어머님이 아버님도 없이 혼자 사시다가 큰일이라도 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상황 어려운 아주버님에게 뭔가 기대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시누는 이제 재혼해서 어린아이 키우는 입장이라 만약 자식들 중에 어머님을 모시고 살아야 그 집은 저희밖에 없는 상황이었죠.

물론 제가 시어머니에게 악감정이 없고 감사하는 마음이지만 모시고 같이 산다는 것은 정말 쉬운 결정은 아니었습니다.

시댁 형제들 중에 저희 집이 가장 나은 편이라지만 그렇게 여유 있는 살림은 아닌 데다가 아들까지 공부시켜야 하는 상황에서 선뜻 결정을 내리기 힘들더라고요.

그렇다고 어디 아픈 곳도 없는 시어머니를 요양원에 가시라 할 수도 없는 일이고 근처에 병원도 없는 시골에서 계속 혼자 사시게 하는 것도 안 될 일이었죠.

“여보 진짜 내가 염체 없는 부탁인 건 아는데…
우리 엄마 우리가 모시자.
평생 아버지랑 살면서 고생만 하셨고
노년에라도 좀 편하게 해드리고 싶어.
우리 엄마 성격은 당신도 알잖아.

엄마 모시고 같이 살더라도
당신한테 이거 해라 저거 해라
눈치 주고 살림 간섭하실 분 아니야.”

쉽게 결정 못 내리고 몇 달 동안 고민만 하고 있었는데, 남편의 진심 어린 부탁으로 어머님과 함께 한번 살아보기로 했어요.

만약 같이 살다가 정 사이가 안 좋아질 것 같으면 그때는 우리 집 근처에 어머님 혼자 사실 수 있는 작은 집을 얻어들이기로 하고 일단 시골 사시던 어머님을 저희 집으로 모셨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어머님과의 합가는 제 예상과는 정말 정 반대였어요. 아무리 그래도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인데 같이 살다 보면 불화가 생기면 어쩌나 하는 걱정들이 있었는데, 완전 쓸데없는 걱정이었습니다.

제가 어머님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어머님이 제 눈치를 더 많이 살피며 지내시는 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어미니께 집에서 절대 집안일 하지 마시고, 편히 계시라고 말씀드려도 낮에 온 집안 청소며 빨래까지 매일 해 놓으셨어요.

저도 아이 키우고 회사 다니면서 나름대로 집안일을 열심히 한다고 생각했지만, 어머님이 저희 집에서 같이 사신 뒤로부터 너무 깨끗해지고, 제가 퇴근하고 돌아오면 아무것도 할 것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오히려 제가 너무 죄송한 마음이 들어 제발 일하지 마시고, 편히 지내시라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는데도 시어머니는 이렇게 해야 마음이 편하니까 말리지 말라면서 계속 집안일을 도맡아 하셨죠.

회사에서 늦게 퇴근하는 날에도 예전 같았으면 집에 혼자 있을 아들 걱정에 발을 동동 굴렀었지만 이제는 어머님이 집에 계셔서 얼마나 마음이 놓이는지 몰라요.

제가 퇴근하기 전까지 학원 갔다 돌아온 아이에게 간식도 챙겨 먹이시고 장을 봐서 냉장고에 음식을 채워놓으면 어머님이 알아서 반찬과 국을 끓여서 저녁 식사 준비까지 완벽하게 다 해놓으십니다.

저는 오히려 어머님과 같이 살기 전에는 내가 어머님 입에 맞는 음식을 해드려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지만 막상 같이 살아보니 주말 이틀을 제외하면 대부분 어머님이 직접 식사 준비를 다 해 놓으시는 바람에 요리할 새가 없더라고요.

이렇게 모든 것을 다 해 주시는 어머님에게 용돈이라도 넉넉하게 드려야겠다는 생각에 매달 50만 원씩 용돈 용돈을 챙겨드리겠다 했더니, 자기는 돈 많다며 용돈 필요 없다고 한사코 거절을 하시는 겁니다.

“어머님… 이제 일도 안 하시는데
저희가 드리는 용돈도 안 받으시면 어떡해요.
여기는 시골도 아니라서 밖에 나가면
전부 돈 필요한데 주머니에 용돈이라도 없으면
마실 나가서 계실 곳도 없어요. “

50만 원이 큰돈은 아니었지만 저희가 매달 부담 없이 드릴 수 있는 최대한의 금액이었고 드릴 때마다 필요 없다고 거절하셨기 때문에 나중에는 시어머니 계좌에 말없이 돈을 넣어드렸어요.

하지만 그럴 때마다 다시 현금을 찾아와서 안방  화장대 위에 돈을 올려놓으셨어요. 어머님 입장에서 큰돈을 한 번에 드리니까 부담되어 안 받으시나 하는 생각에 틈날 때마다 3만 원 5만 원씩 작게 용돈을 드렸지만 그 돈조차 마트에서 장 받아가 반찬 만드시거나 저희 아들한테 간식 사주는 용도로 전부 쓰시더라고요.

그렇게 반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아직까지도 단 한 번도 제가 드리는 용돈을 받은 적 없으셨고 오히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어머님께서 종종 과일이나 간식거리를 사서 들고 오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당시에는 큰돈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랬는지 저도 별다른 생각이 없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이상해지더라고요.

일도 안 하시고 큰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닌 어머님이 대체 무슨 돈으로 자꾸 간식을 사 오고 손자한테 몇 천 원씩 용돈도 쥐어주시는 건지 궁금해지기 시작했어요.

남편에게 혹시 어머님께서 시골집 처분한 돈을 꺼내서 쓰고 계신 거냐고 물어봤었는데 시댁 집이랑 땅 판 돈은 애초에 그리 큰 돈도 아니고 전부 어머님 통장에서 한 푼도 줄어들지 않고 그대로 있다 하더라고요.

한 가지 더 이상한 건 제가 출근한 낮 시간에 어머님에게 전화를 걸어보면 집에 계신 적이 없으시고 항상 마실 나왔다고 하면서 밖에 계셨어요.

남편과 몰래 어디서 아르바이트라도 하고, 오시는 건가 생각도 해봤지만, 기계도 잘 만지지 못하고 나이도 내일모레 팔순이신데 그런 어머님에게 어떤 사장이 일자리를 주겠나 싶더라고요.

그런데, 얼마 전에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는 길에 아파트 경비 아저씨께서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면서 저를 불러 세우시더라고요.

“1503호 맞으시죠.? 저기 다른 게 아니라,
앞으로 아파트 뒤쪽 공터에 리어카를 세워두면
안 될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지금까지는 사정사정하는 바람에
눈감아주긴 했는데
다른 주민들 민원이 자꾸 들어와.
나도 더 이상은 어쩔 수가 없어요.
이번 주까지 리어카 다른 곳으로 치워줘요.”

저는 제가 1503호에 사는 건 맞지만, 리어카는 처음 듣는 이야기라 어리둥절했죠.

“리어카요? 저희 집에 리어카 쓸 사람이 없는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

그러자 경비 아저씨 이야기는 저희 집에 사시는 어르신이 지난 7월부터 아파트 단지 안으로 리어카를 끌고 들어와서 인적 드문 공터에 몰래 세워두기 시작하셨답니다.

처음에는 경비 아저씨가 리어카 세워두면 안 된다고 치워야 한다고 말씀드렸는데 하도 사정을 하는 바람에 지금까지 모르는 척 눈감아주고 있었답니다.

하지만 얼마 전에도 1층 사는 주민들에게 리어카 치워달라는 민원이 관리사무소로 들어와서 더는 사정을 봐줄 수 없다며 제발 치워달라는 말씀이었죠.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지만, 리어카 어르신의 인상착의는 너무나도 제가 잘 아는 사람이었고 당연히 그분은 저희 집에 사시는 시어머니였습니다.

“아니… 뭐…
운동 삼아 동내 폐지 주우러 다니신다는데
앞으로는 단지 안에 두지 말고
다른 곳에 보관하시라고 말씀 좀 꼭 전해줘요.
나도 이렇게 하고 싶진 않은데
그게 뭐라고 민원을 넣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어요.”

저는 순간 머리를 망치로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더라고요. 지난여름에 어머님이 사 오셨다며 아무 생각 없이 맛있게 먹었던 수박과 참외들이 그리고 어머님이 장 봐온 재료들로 만들어주신 반찬들이 전부, 어머님께서 낮 시간에 동네를 돌아다니며 모은 폐지를 팔아 번 돈이라는 걸 알게 된 순간이었죠.

정말 인터넷에만 있는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자식 몰래 폐지 팔아서 돈을 버는 어르신이 바로 저희 집에 같이 살고 있는 시어머니인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집으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경비 아저씨가 말하는 아파트 뒤편 공터로 가고 봤더니, 얼마나 오래 끌고 다니셨는지 손때가 묻고 낡은 리어카가 덩그러니 세워져 있더라고요.

남편에게도 차마 이야기 못 했고 집에 들어와서 어머님 얼굴을 보니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서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다음 날 회사에 하루 월차를 내고 몰래 출근하는 척 똑같은 시간에 집을 나섰어요.

그리고 주차장에 있는 제 차 안에 숨어서 어머님이 집에서 나오시길 기다리고 있었죠.  아침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어머님이 집에서 나오셨고 설마설마했지만, 역시 아파트 뒤쪽으로 가셔서 리어카를 끌고 나오시더라고요.

더는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어머님에게 달려갔고 갑자기 나타난 제 모습에 어머님은 깜짝 놀라셨어요.

“너가 이 시간에 여기엔 웬일이야?
회사에 출근 안 했어?”

저는 아무 대답도 못하고 어머니를 붙들고 펑펑 울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좀 흘러서 어느 정도 진정이 된 후에 이제 날씨도 추워지는데 제발 폐지 줍는 일은 하지 마시라고 어머님 붙들고 통곡을 하며 사정을 했어요.

“어머니…, 용돈이라면 저희가 드릴게요.
모시고 산다 해놓고, 어머님 고생만 시키면
너무 죄송하잖아요. “

어머님은 제 말에 당황하시면서 그냥 집에만 있으면 답답하니까 동네 산책할 겸 벌이는 박스 주워서 소소하게 용돈 벌이 정도 하는 거라고 하셨지만, 폐지 그거 하루 종일 주워서 돈을 얼마나 버시겠어요.

폐지값은 제가 잘 모르지만 만원 벌려고 하면  추운 날, 더운 날에도 길에서 하루종일 고생하실 텐데 아무 생각 없이 어머님이 사 오신 음식들을 넙죽넙죽 받아먹었던 제가 너무 한심하고 미련하더라고요.

그날은 어머님 모시고 나가서 같이 마시는 점심도 먹고 시내의 옷 가게에서 겨울 잠바와 편하게 입으실 옷도 몇 벌 더 사드렸어요.

필요 없다고 안 받겠다고 하시는 걸 끝까지 계산해서 어머님께 안겨드렸고 저희 옛날이랑은 다르게 어머님에게 이 정도는 해드릴 능력 되니까 편히 받으시라 말씀드렸어요.

그날 저녁에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에게 모든 사실을 이야기했고 어머님과 셋이서 한참을 이야기한 뒤 앞으로 더 이상 폐지는 죽지 않는 쪽으로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매달 용돈을 50만 원씩 드리기로 했고 절대 어머님이 무슨 일을 하던 돈 벌 생각은 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당부했습니다.

집에 있기 심심하시면 아파트 뒷산에 있는 등산로를 산책하시거나 집 근처에 있는 노인 복지관에서 취미를 찾아보시라고 말씀드렸어요.

그리고 저희가 매달 용돈을 50만 원씩 드리기로 했고 절대 어머님이 무슨 일을 하던 돈 벌 생각은 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당부했습니다.

다음 날 남편이 어머님 모시고 동네 고물상 찾아가서 손때 묻은 리어카를 헐값에 팔아버린 뒤에 앞으로 혹시라도 저희 어머님이 폐지 팔기 위해 찾아오신 절대 받아주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그 이후로 지금은 어머님이 다른 취미를 찾으신 것 같아요.  아파트의 연세 비슷한 다른 어르신들과 집 앞 공원에 모여 운동도 하시고 저희가 드리는 용돈으로 종종 마시는 것도 사드시고 오시더라고요.

저희가 언제까지 같이 살 수 있을지는 몰라도 우리 집에 같이 계신 동안에는 어머님이 편히 지내시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남들만큼 효도는 못 해드리더라도 제가 할 수 있는 만큼은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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