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밥이 뜯어진 운동화 지퍼가 고장 난 검은 가방, 그리고 색 바랜 옷…. 내가 가진 것 중에 해지고 낡아도 창피하지 않은 것은 오직 책과 영어사전뿐이었습니다.
집안 형편이 너무 어려워 학원 수강료를 내지 못했던 저는 칠판을 지우고 물걸레질을 하는 등 허드렛일을 하며 강의를 들었어야 했습니다.
수업이 끝나면 지우개를 들고 이 교실 저 교실 바쁘게 옮겨 다녀야 했고, 수업이 시작되면 머리가 하얗게 분필 가루를 뒤집어쓴 채 맨 앞자리에 앉아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엄마를 닮아 숫기가 없던 나는 오른쪽 다리를 심하게 절고 있는 소아마비입니다. 하지만 전 결코 움츠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내 가슴속에선 앞날에 대한 희망이 고등어 등짝처럼 싱싱하게 살아 움직였죠.
그런 저를 못마땅하게 보는 친구들도 있었죠. 장애인 주제에 무슨 공부를 하냐며 공장에 들어가도 써주지도 않을 거 같은데 집에서 잠이나 자라며 저에게 막말을 퍼붓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모욕을 듣고도 화낼 수 없었습니다. 저에겐 그 시간마저 사치고 낭비였거든요. 저는 공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짧은 오른쪽 다리 때문에 뒤뚱뒤뚱 걸어 다니며, 가을에 입던 홑 잠바를 한겨울까지 입어야 하는 가난 속에서도 저는 이를 악물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추운 겨울날, 책 살 돈이 필요했던 저는 엄마가 생선을 팔고 있는 시장에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몇 걸음 뒤에 엄마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차마 더 이상 엄마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눈물을 참으며 그냥 돌아서야 했습니다.
엄마는 낡은 목도리를 머리까지 침침 감고, 질척이는 시장 바닥 좌판에 앉아 김치 하나로 차가운 도시락을 먹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날 밤 나는 졸음을 깨려고 몇 번이고 머리를 책상에 부딪혀 가며 밤새워 공부했습니다. 가엷은 나의 엄마를 위해서….
제가 어릴 적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엄마는 형과 나, 두 아들을 힘겹게 키우셨습니다. 형은 불행히도 나와 같은 장애인이었습니다.
형은 중증 뇌성마비인 심한 언어장애 때문에 말 한마디를 하려면 얼굴 전체가 뒤틀려 무서운 느낌마저 들 정도이죠. 그러나 형은 엄마가 잘 아는 과일 도매상에서 리어카로 과일, 상자를 나르며 어려운 집안 살림을 도왔습니다.
그런 형을 생각하며 나는 더욱 이를 악물고 공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뒤 시간이 흘러 바라던 서울대에 합격하던 날, 나는 합격 통지서를 들고 제일 먼저 엄마가 계신 시장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날도 엄마는 좌판을 등지고 앉아 꾸역꾸역 찬밥을 드시고 있었습니다. 그때 나는 엄마에게 다가가 등뒤에 엄마의 지친 어깨를 힘껏 안아 드렸습니다
“엄마.. 엄마.. 나 합격했어!
나는 눈물 때문에 더 이상 엄마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습니다. 엄마도 드시던 밥을 채 삼키지 못하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시장 골목에서 한참 동안 나를 꼭 안아주셨습니다.
그날 엄마는 찾아오는 단골손님들에게 함지박 가득 담겨있는 생선들을 돈도 받지 않고 모두 내주셨습니다.
그리고 형은 자신이 끌고 다니는 리어카에 나를 태운 뒤, 입고 있던 잠바를 벗어 내게 입혀주고는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로 나를 자랑하며 시장을 몇 바퀴나 돌았습니다. 그때 나는 시퍼렇게 얼어있던 형의 얼굴에서 기쁨의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날 저녁, 시장 한 구석에 있는 순대국밥 집에서 우리 가족 셋은 오랜만에 함께 밥을 먹었습니다. 엄마는 지나간 모진 세월의 슬픔이 복받치셨는지 국밥 한 그릇을 다 들지 못하셨습니다.
그저 색 바랜 국방색 전대로 눈물만 찍으며 돌아가신 아버지 얘기를 꺼냈습니다.
“너희 아버지가 살아 있다면 기뻐하셨을 텐데…. 너희들은 아버지를 이해해야 한다. 원래 심성은 고운 분이셨어.. 그토록 모질게 엄마를 때릴 만큼 독한 사람은 아니었어.. 계속되는 사업 실패와 지겨운 가난 때문에 매일 술로 사셨던 거야..
그리고 할 말은 아니지만… 하나도 아닌 둘씩이나 몸이 성치 않은 자식을 둔 아비 심정이 오죽하겠니…
내일은 아침 일찍 아버지께 가봐야겠다. 가서 이 기쁜 소식을 얼른 알려야지”
내가 어렸을 때 부모님은 자주 다투셨는데. 늘 술에 취해 있던 아버지는 하루를 멀다 하고 우리들 앞에서 엄마를 때렸습니다.
그러다가 하루종일 겨울비가 내리던 어느 날, 아버지는 아내와 자식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유서 한 장만 달랑 남긴 채 끝내 세상을 버리고 떠나고 말았죠.
고등학교 졸업식날, 나는 우등상을 받기 위해 단상 위로 올라가다가 중심이 흔들리는 바람에 그만 계단 중간에서 넘어져 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움직이지 못할 만큼 온몸이 아팠습니다. 그때 부리나케 달려오신 엄마가 눈물을 글썽이시며 얼른 나를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잠시 뒤 나는 흙 묻은 교복을 털어 주시는 엄마를 힘껏 안았고 그 순간, 내 등뒤로 많은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한 번은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컵라면으로 배를 채우기 위해 매점에 들렀는데 여학생들이 여럿 앉아 있었습니다.
그날따라 유독 절뚝거리며 그들 앞을 걸어갈 자신이 없었습니다. 구석에 앉아 컵라면을 먹고 있는 내 모습이 측은해 보일까 봐, 그래서 혹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올까 봐 주머니 속 동전만 만지작 거리다가 그냥 열람실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곤 흰 연습장 위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어둠이 내릴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어둠에서 다시 밝아질 것이다”
이제 내게 남은 건 굽이굽이 고개 넘어 불꽃과 함께 누워계신 내 아버지를 용서하고, 지루한 어둠 속에서 꽃등처럼 환히 나를 깨어준 엄마와 형에게 사랑을 되갚기로 다짐했습니다.
지금 형은 집안일을 도우면서 대학 진학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형은 아무리 피곤해도 하루 한 시간씩 큰소리로 더듬더듬 책을 읽어 가며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발음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은 채말이죠.
오늘도 나는 온종일 형을 도와 과일 상자를 나르고 밤이 돼서야 일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어두운 창 밖을 바라보며 문득 앙드레 말로의 말을 떠올렸습니다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 간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말인 것 같습니다.
위의 글은 서울대학교 합격자 생활수기공무 중 한편입니다. 그 후 이 학생은 우수한 성적으로 서울대를 졸업하고 지금은 미국에서 우주항공을 전공, 박사과정에 있으며 국내의 굴지 기업에서 전부 뒷바라지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머니와 형도 미국에 모시고 뒷바라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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